사적 민원은 물론 도 넘은 인신공격까지…청와대 “공론의 장” 비상식적 글 제재키로
지난달 18일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가수 겸 배우 수지를 겨냥한 내용이었다. 이 글을 올린 게시자는 “양예원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진 스튜디오가 수지의 섣부른 행동으로 여론몰이의 희생양이 되어 폐업당할 위기에 처했다”라며 “수지를 사형이라는 엄벌에 처해 돼지들에게 사회 정의의 본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폈다.
연예계를 향한 도 넘은 악플이나 비판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청와대 국민청원이라는 창구가 생긴 후 새로운 풍속도가 그려지고 있다. 공공성을 목적으로 한 이곳에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글이 올라오는 모양새다. 또한 모든 대중의 이목이 쏠리는 공간인 만큼 이곳에 올라오는 글 하나하나가 기사화되면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수지의 사형을 요구하는 글이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다는 것을 몰랐던 이들이 관련 기사를 본 후 뒤늦게 이런 사태를 알게 되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사태가 커지는 형국이다.
# 필터링 안 되는 국민청원, 신문고라 할 수 있나?
지난달 23일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그룹 FT아일랜드 이홍기를 언급하는 글이 올라왔다. 그가 자극적인 내용을 담은 아프리카TV BJ철구의 방송을 시청했다는 이유로 ‘이홍기를 처벌해달라’는 주장이었다. 이 청원을 올린 이는 “이홍기는 BJ철구 방송 애청자”라며 “직접 방송 중 채팅을 친 것을 목격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BJ철구는 5·18민주화운동을 비롯해 장애인들을 비하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어서 그를 바라보는 여론의 눈빛이 따가운 인물이다.
수지 앨범 재킷
이홍기는 자신의 SNS에 “진짜 사람 미치게 하네. 날 잘 알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텐데 무슨 해명을 하라고 난리네. 뭐 떨어진 정이야 어쩔 수 없다만 난 그런 거 아니야 더 이상 이 주제로 얘기하지 말자”라는 반박 글을 올렸고, 이에 그의 해명 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다가 급기야 국민청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배우 겸 방송인 이광수 역시 이와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그가 출연 중인 SBS ‘런닝맨’에서 게스트인 걸그룹 AOA 혜정에게 “너 꽃뱀이지?”라는 농담을 건넨 것을 두고 ‘연예인 이광수의 사형을 청원합니다’라는 청원이 게재됐다.
이 같은 청원이 계속되자 청와대 온라인 소통 책임자인 정혜승 청와대 뉴미디어 비서관은 라이브 방송 ‘11:50 청와대입니다’에 출연해 자제를 당부했다. 정 비서관은 “특정인에 대한 사형 청원은 올리지 말아달라. 청원이라는 공론의 장을 함께 지키고 키워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욕설, 비방, 허위 사실, 명예훼손 정보, 도배글 등은 기준에 따라 삭제된다”며 향후 이 같은 게시물을 제재할 계획을 전하기도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가 개설된 후 6월 12일 오전 8시 현재까지 올라 온 청원글은 20만 7873건(중복 포함)이다. 그 중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청와대가 공식적으로 답변을 내놓은 청원은 34건이다. 응답률은 약 0.016%. ‘20만 명 이상의 동의’라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에 응답률 자체가 낮은 것을 탓할 순 없다. 하지만 필터링 없이 모든 청원이 게시 가능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사실을 호도하고 상식을 벗어난 청원들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또한 이 문제점을 짚는 과정에서 언론이 이런 청원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 순기능 있다! 억울함 풀어주는 국민청원
국민청원이 연예계에 미치는 순기능도 있다. 대표적 사례로 수사 종결된 지 9년이 지난 배우 장자연의 사망 사건이 재수사된다. 이 사건을 다시 수사해달라는 국민청원은 지난 3월말 마감 당시 20만 건 이상의 동의를 얻어내 청와대의 답변을 받았다. 이후 서울중앙지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재수사를 권고했고, 수사가 재개됐다. 이는 공소시효(8월 4일)를 약 두 달 앞두고 결정된 터라 더욱 극적이었다.
당시 청원은 “힘없고 빽없는 사람이 사회적 영향력 금권 기득권으로 꽃다운 나이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만들고 버젓이 잘살아가는 사회, 이런 사회가 문명국가라 할 수 있나.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장자연이 느꼈던 고통을 받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 우리의 일상에 잔존하는 모든 적폐는 청산돼야 한다”라는 설득력 있는 내용이 담겨 많은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수지 사형 청원’을 비판하는 청원들도 여럿 눈에 띈다.
이외에도 연극인 이윤택 성폭행 진상규명 촉구 청원과 단역배우 두 자매 사건 재수사 요청 청원 등도 20만 건 이상의 지지를 얻은 연예계 관련 청원이었다.
결국 이윤택은 구속됐고 여성가족부·경찰청·문화체육관광부 등 12개 부처가 성폭력 근절 대책 협의체를 구성해 신고·상담·진상조사를 하고, 경찰청은 엄정 수사 및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방지, 법무부는 법률 개정 등으로 역할을 분담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지난 2004년 단역배우 여성이 소속 기획사 남성들로부터 수차례 성폭행을 당한 후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 자살했고 여동생도 며칠 뒤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재수사를 촉구하는 청원에는 22만 명 넘는 이들이 동의 의사를 밝혔다. 3월 초 국민청원이 제기된 후 경찰청에서 진상조사TF를 꾸려 사건 전반을 검토하기도 했다.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고 수사기록도 폐기돼 현행법상 재수사에 어려움이 있지만 대중의 관심이 높은 사안인 만큼 여전히 귀추가 주목된다.
이외에도 지난 6월 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고 김성재 사건 재수사 해주세요’라는 제목의 글도 올라왔다. 글쓴이는 “김광석 사건과 마찬가지로 미제로 끝난 사건입니다 다시 한 번 재수사 부탁드립니다”라고 당부했다.
한 연예계 관계자는 “건강하고 논리정연한 청원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어 해당 사안을 되새김하고 재수사로 이어지는 긍정적 결과를 내고 있다”며 “흥미 위주로 구전되다가 사라져버리던 연예계 사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국민청원의 순기능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