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비리’ ‘셀프연임’ 논란 피해가려 정부기조에 발맞춰…업무량 그대로인데 근무시간만 줄어든 상황에 직원들은 ‘난감’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4월 19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노동시간 단축 관련 은행업종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시중은행장들과 만난 ‘은행업종간담회’에서 “은행이 노동시간 단축의 모범사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실상 은행들의 근로시간 단축 조기 도입을 주문한 셈이다. 금융권은 그간 ‘채용비리’, ‘셀프연임 논란’ 등으로 사정당국의 칼끝에 놓였던 만큼 김 장관의 솔선수범 오더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잇단 논란으로 긴장하고 있는 은행권이 앞다퉈 정부 기조에 발맞추려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당초 은행권에서는 NH농협은행이 가장 먼저 주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모회사 농협중앙회가 내달 1일부터 주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해야 하는 만큼 은행 또한 이에 맞출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농협은행은 아직까지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정시퇴근을 위한 PC오프제를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NH농협금융지주 관계자는 “농협중앙회의 경우 정부기관에 준하는 기관이므로 도입해야 하지만, 은행은 1년의 유예기간을 받은 상황”이라며 “검토는 할 수 있겠지만 아직 별도의 구체적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다른 시중은행들은 주52시간 근무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IBK기업은행은 당장 오는 7월에 조기 도입할 예정이며, 나머지 은행들 또한 하반기 중 도입하기 위해 TF를 구성했다. 이미 다수 시중은행은 각자 사정에 맞춰 저마다 ‘PC오프(OFF)제’나 ‘유연근무제’ 등을 도입해왔으나 재정비에 나서고 있다.
IBK기업은행은 2009년부터 퇴근시간에 맞춰 자동으로 업무용 컴퓨터가 종료되는 PC오프제를 도입했다. 최근에는 직원들이 점심시간 1시간 동안 업무용 PC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IBK런치타임’을 도입했다. 임직원의 점심시간을 보장하고 근로시간을 정확히 지키려는 목적이다. 고용노동부의 ‘근로시간 해당 여부 판단기준 및 사례’에 따르면 ‘휴게시간 및 대기시간’은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휘·감독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용이 보장된 시간을 말한다. 따라서 점심시간은 근로시간에 해당하지 않는다.
KEB하나은행은 최근 TF를 구성해 일부 직무에 대한 분석에 나섰다. 공항 소재 영업점과 일요일 영업점 등 특수영업점, 어음교환, 정보기술 상황실 등 주 52시간을 초과하거나 야근이 잦은 직무의 현황을 분석하고 주52시간 도입 시 대응방침을 하기 위해서다.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본점의 경우 이미 대부분 주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되고 있다”며 “TF팀은 야간에만 근무가 가능한 어음교환 등 특수직무에 적용하는 방안과 지점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KB증권, IBK투자증권, 미래에셋대우 등 증권사들도 유연근무제를 우선 도입하고 PC오프제 등을 검토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보험업계와 카드업계, 저축은행업계 또한 저마다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금융권 근로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정부가 주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취지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실현과 일자리 창출인데, 실상은 근무시간만 줄어들 뿐 업무강도는 더 세졌다고 토로한다. 특히 유예기간이 남았음에도 조기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직원들만 난처해졌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강제 퇴근을 도입한 한 금융사에서는 ‘꼼수’도 등장했다. 회사가 퇴근을 강제한 탓에 직원들이 퇴근 이후 개별적으로 다시 출근해 잔업을 한다는 것. 직원 개인이 자율적으로 업무를 하는 것은 주52시간 근무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증권사는 한 부서 직원이 모두 퇴근 후 근처 오피스텔로 이동해 연장근무를 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릴 정도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회사는 주52시간 도입에 적극적이지만 대부분 직원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본다“며 ”펀드, 연금 업무가 많은 증권사의 경우 ‘펀드가 5시까지 매매되는데 정시 퇴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전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오전 7시까지 출근해 업무를 해도 업무량이 많아 야근을 해야 할 정도”라며 “인력이 늘어나거나 업무량이 줄지 않는데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거나 강제 퇴근시키면 결국 퇴근 후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업무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개인적으로 잔업을 하면 회사가 야근수당을 주지 않아도 되는 근거가 되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나온다.
홍보·대관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는 고충이 더욱 크다. ‘접대’를 근무로 포함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의 ‘근로시간 해당 여부 판단기준 및 사례’에 따르면 ‘업무 수행과 관련이 있는 제3자를 소정근로시간 외에 접대하는 경우 이에 대한 사용자의 지시 또는 최소한의 승인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근로시간으로 인정 가능’하다. 그러나 고용노동부가 제시한 사례에서는 ‘자신의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고 좋은 대내외의 평가 등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할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 근로시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저녁 술·식사자리나 주말 골프 접대 자리에 참여할 경우, 직원이 “일을 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라고 하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근무시간 외 단합행사, 강의 등은 자발적일 경우 근무시간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사측에서는 늘 단서로 ‘자율참석’이라고 안내한다”며 “그러나 과연 ‘자율’이겠느냐, 현실적이지 못한 이야기”라고 전했다.
접대에 법인카드를 사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법인카드로 결제할 경우 ‘최소한의 승인’이 이뤄진 셈이므로 근무시간에 포함된다는 것. 한 금융사 홍보담당 직원은 “법인카드를 사용하면 근로시간으로 처리될 텐데 퇴근시간 후 저녁시간에 약속을 잡는 경우 법인카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니냐”며 “저녁약속을 줄여나갈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업무가 있는데 갑자기 저녁약속을 없애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선진국은? 근로시간 저축 참신하네 고용노동부의 ‘노동시간 단축 가이드’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우리나라 근로자의 연간근로시간은 2502시간이다. OECD 평균은 한국보다 795시간 적은 1707시간, 그 가운데 독일과 네덜란드 등 유럽 선진국은 유독 적은 근로시간을 기록했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연간근로시간은 각각 1298시간, 1359시간이다. 근로시간이 짧기로 유명한 독일은 현재 주 38.5시간 근무제를 시행 중이다. 독일은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통해 근로 유연성을 높였다.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란 실근로시간과 소정근로시간의 차이를 계좌에 적립, 휴가나 휴식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제도다. 법률상 명시적 규정은 없으나 근로시간법이 규정한 범위 내에서 통상적으로 기업 내 단체협약이나 경영협정에 따라 실시한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성수기 때 초과근무했던 근로시간을 저축해뒀다가 불경기 때 사용해 대량 해고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로 1990년대 독일 폴크스바겐은 경영위기 상황에서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도입, 고용조정 없이 위기를 극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는 ‘생애저축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임금의 일부 및 연장·휴일근로시간을 적립해 기금을 마련, 능력개발과 육아 등 장기휴가가 필요할 때 혹은 휴직 시 저축된 기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노동원의 ‘해외노동동향’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는 해당 제도를 통해 근로자는 1년에 연봉 12%까지 저축이 가능하고, 해당 자금에 대해서는 세금공제혜택을 받는다. [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