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장 발급 때 서류 진위 아닌 일치 여부만 판단…‘세컨더리 보이콧’ 적용 가능성 낮아
북한 석탄 문제가 점화된 뒤 국내 은행 두 곳이 북한 석탄 관련 신용장 거래를 승인해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게 최근 언론 보도의 골자였다. 이는 억측에 불과하다는 게 관련 업계의 목소리다. 은행은 신용장 거래 시 서류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서류의 일치와 불일치만 판단하는 까닭이다.
국제무역에서 거래 핵심은 대금 지급이다. 구매업체 입장에서는 물건 값을 미리 줬다가 물건을 받지 못할 때가 생기고 판매업체 쪽에서는 물건을 보냈는데 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신용장은 판매업체와 구매업체의 이런 고민을 해결하려 나온 무역대금지급방식이다.
쉽게 말해 국제무역에서 은행의 역할은 전자상거래업계에서 11번가, 옥션, G마켓 등의 역할과 비슷하다. 구매업체는 구매대금을 은행에 넣어 놓는다. 은행은 판매업체에게 “구매업체가 내게 돈을 맡겼다. 돈 받는 건 내가 보증한다”는 신용장을 준다. 판매업체는 신용장을 받은 뒤 물건을 보내고 선적 서류를 은행에 제출하면 은행은 구매업체가 맡긴 돈에서 수수료 일부를 제하고 판매업체에 구매업체가 맡겼던 돈을 내준다.
이 과정에서 은행의 역할은 서류의 진위 여부 확인에 있지 않다. 구매업체가 돈을 맡길 때 제시했던 조건과 선적 서류를 비교해 사실 일치 여부만 본다. 가령 구매업체가 “몇 월 며칠까지 물건이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향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우면 판매업체가 내놓은 선적 서류에서 구매업체의 조건에 완벽하게 상응하는지 여부만 확인한다. 은행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난다. 서류가 의도적으로 위조되면 은행은 알 수가 없다. 은행은 수사기관이 아니다.
지난 2005년 북한 자금세탁 혐의로 제재를 받은 방코델타아시아(BDA)가 파산한 사례와 청산 절차를 밟고 있는 라트비아 은행 ABLV의 사례가 은행 위기론의 주요 논리다. 이들 은행은 은행 안에서 도는 돈이 북한의 돈, 혹은 북한 사람의 돈이라는 걸 인지한 상태에서 일을 벌이다 비극을 맞았다. 지금 한국의 은행들이 마주한 상황과는 다르다.
게다가 현재 무역금융을 하는 은행에서는 UN대북제재안으로 인해 관련 서류에 북한이 표기되면 일단 서류 접수 자체가 되지 않는다. 과거 유사한 제재 대상 국가이던 이란이나 미얀마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업체는 몇 해 전까지 수출품의 출발지를 폭넓게 적어 북한산이나 제재가 가해진 나라의 수출품을 수입하기도 했다. 한 국제무역 관계자는 최근의 언론 보도에 대해 “은행의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잘라 말했다.
이란산을 수입할 땐 페르시아만 항(Persian Port)을 주로 썼다. 페르시아만 항구라고 적으면 은행 입장에서는 이란에서 선적하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페르시아만을 공유하는 나라만 이란을 포함 바레인, 사우디, 이라크, 카타르, 쿠웨이트, UAE 등 7개국인 까닭이다. 미얀마 금수 조치 때 일부 수입업체는 선적지를 아시아 항구(Asian Port)라고 적었다.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재 은행은 무역금융 서류 접수 때 이런 표기를 거부한다. 무조건 국적과 항구 이름을 정확하게 명기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국적을 위조하면 은행으로선 알 길이 없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