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A·B 감독들과는 협상 성과 못내고 뜻밖의 인물과 계약…“공은 이미 넘어가…우려보다 격려를”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 선임위원회 김판곤 위원장은 17일 오전 축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한국 대표팀을 이끌 새로운 감독으로 파울루 벤투 감독을 소개했다. 김 위원장은 여러 명의 감독 후보군들과 유럽에서 협상을 가진 뒷얘기를 전하며 한국 팬들이 좋아하는 명장들을 ‘모셔오지’ 못한 이유로 ‘현실의 벽은 높았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의미다. 파울루 벤투 감독은 대한축구협회와 4년 6개월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김판곤 위원장은 대표팀 감독 선임을 앞두고 두 차례 유럽 출장을 다녀왔다. 첫 번째가 ‘플랜 A’였다면 두 번째 출장은 ‘플랜 B’였다. 먼저 플랜 A에 후보군에 오른 감독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명장들이었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전 레스터시티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 전 독일 감독, 바히드 할릴호지치 전 일본 감독 등이 물망에 오른 걸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은 이들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누가 와도 팬들이 좋아할 만한 감독들이었다”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17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파울루 벤투 전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을 새로운 대표팀 사령탑으로 확정했다고 밝히고 있는 김판곤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 연합뉴스
7월 9일 직접 유럽에 나가 후보군들과 접촉했던 김 위원장은 나름 자신을 갖고 있었다. 축구협회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시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새로운 감독을 영입하려고 책정한 금액이 지난 감독 선임 때보다 높았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래서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서 능력을 보여줬거나 잘 하다가 약간 하향세를 타고 있는 감독들 중에서 우리와 축구 철학이 맞는 감독들을 후보군에 넣었고 그들과의 만남을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감독을 만나기도 전에 대리인(에이전트)이 감당하기 어려운 돈을 준비해야 한다고 해서 못 만난 감독도 있었고 관심을 보이고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 클럽으로부터 오퍼를 받는 바람에 협상이 무산된 사례도 있었다. 후보군에 있는 감독들한테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결국 8월 5일, 플랜 A에 있던 후보군들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잠시 귀국한 김 위원장은 8월 9일 두 번째 유럽 출장을 떠나 3개국을 돌며 4명의 후보를 만났다. 이번에도 역시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키케 플로레스 전 에스파뇰 감독, 후안데 라모스 전 말라가 감독, 슬라벤 빌리치 전 웨스트햄 감독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은 “두 번째 출장에서 팬들의 지지를 받는 유력 후보와 연락이 닿았고 그분의 초청으로 집을 방문해서 대화를 나눴다”고 설명했다. 그는 바로 키케 플로레스 감독이었다.
“그분은 가족들과 떨어져 4년 반을 한국에서 지내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했다. 한국 축구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솔직히 잘 모른다고 답하더라. 손흥민, 기성용 정도를 안다고 말했다. 내 앞에서는 직접 돈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대리인이 내게 맥시멈으로 줄 수 있는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었다. 우리 상황에서 맥시멈 금액을 제시했는데 그 정도로는 안 된다는 대답이 나왔다.”
김 위원장은 플랜 B의 후보군과 접촉하면서 가장 크게 부딪힌 부분이 ‘돈’이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또 다른 후보는 축구 중심인 유럽을 떠나 아시아로 간다면 동기부여가 있어야 한다면서 대리인이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을 제시했다. 두 번째 출장에서는 50대 초중반의 비교적 젊은 감독들을 후보군에 포함시켰는데 몸값과 한국 축구에 대한 이해 부족 등이 드러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차라리 그럴 바엔 국내 지도자들을 키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 과정에서 후보군에 없던 파울루 벤투 감독이 갑자기 부상했다. 벤투 감독은 다른 후보 감독들과 달리 장기간 한국에 거주하는 데 대해 거부감이 없었고 분명한 축구 철학을 제시했으며 카타르월드컵까지 한국대표팀을 이끌고 싶다고 적극적인 자세로 협상에 임했다. 김 위원장은 벤투 감독의 진정성을 높이 평가했고 여러 가지 의견 교환 끝에 벤투 감독과의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벤투 감독은 1992년부터 2002년까지 포르투갈 대표팀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는데 2002년 한일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의 경기에 출전해 풀타임을 소화한 바 있다. 은퇴 후 자국의 스포르팅 리스본 유소년팀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성인팀을 지휘하며 컵대회와 FA컵 우승을 경험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며 2012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12) 4강 진출을 이뤘다. 2014 브라질 월드컵 G조 조별리그에서 1승1무1패의 성적으로 탈락한 뒤 유로 2016 1차전에서 포르투갈이 0-1의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자 자진 사퇴했다.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는 브라질 크루제이루(2016년), 그리스 올림피아코스(2016~2017년)에서 감독 생활을 이어갔고 지난해 12월 중국 슈퍼리그 충칭 리판 감독을 맡았지만 13위에 머물렀던 성적 그리고 FA컵 16강 탈락 등의 이유로 경질당했다.
축구대표팀 새 사령탑에 오른 파울루 벤투 감독. 연합뉴스
벤투 감독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그가 올림피아코스에서 선수단과 마찰을 빚는 바람에 경질됐고 중국 충칭에서는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이력을 꼽는다. 지도자로서 상향 곡선을 타지 않고 하향세를 타는 감독을 선임했다는 지적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김판곤 위원장은 “벤투 감독은 효율적인 수비와 역습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한국 축구의 철학과 부합한다고 생각했다”면서 “벤투 감독은 우리한테 훈련 준비 등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가 매우 역량이 있는 감독이라고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49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라는 점, 잠시 하향세를 타고 있었지만 자극과 동기부여가 필요했던 벤투 감독한테 한국 축구대표팀은 모험이자 도전의 대상이었을 거라는 게 김 위원장의 얘기다.
김판곤 위원장은 이번 대표팀 차기 감독 선임에 앞서 명확하게 기준을 내세웠다. ▲월드컵 예선 통과 또는 대륙컵 우승을 지도한 감독 ▲세계적인 리그에서의 우승 경험 ▲새로운 한국 축구의 철학에 부합하는 감독 등의 조건을 내걸었다. 벤투 감독은 분명 그에 걸맞은 지도자는 아니다. 최선은 아니었지만 차선책은 된다는 게 김 위원장의 평가다. 일부에서는 벤투 감독이 맡은 팀마다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경질되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음에도 외국인 사령탑 역대 최고 연봉을 약속했다는 점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나타냈다.
“물론 더 유능학고 국제무대에서 검증받은 지도자가 온다면 좋았겠지만 벤투 감독은 협회가 가장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벤투 감독은 이미 협회와 계약을 맺었다. 그런 감독을 향해 이런저런 비판을 가하는 것보다 벤투 감독을 받아들인 우리의 상황을 냉정히 짚어보는 게 필요할 것 같다. 히딩크 감독을 제외한 외국인 감독이 한국 대표팀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야 했던 외국인 감독이 공통적으로 얘기했던 내용이 있다. ‘대표팀을 이런 식으로 이끌어선 좋은 성적 내기 어렵다’라고 말이다. 단시일 내에 성적을 내야 하는 대표팀 감독은 부담이 크고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다. 이전 히딩크 감독이 했던 말 중 ‘평가전에서의 승리를 원하느냐, 아니면 월드컵에서 이기길 바라느냐’하는 내용은 지금도 축구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한 내용이다. 한국 축구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조직력의 극대화가 우선시돼야 한다. 감독이 자주 바뀌어선 그런 조직력을 기대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건 협회가 새로운 감독과 공동운명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문제가 터지면 감독 뒤에 숨지 말고 함께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길 바란다.”
박문성 위원은 위기에 빠진 한국 축구가 감독 한 명 바뀐다고 해서 변화될 거란 기대보다 모두가 함께 그 위기를 타개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벤투 감독은 오랜 시간 동안 함께했던 4명의 전문 코치들과 함께 20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할 예정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신태용 감독은 재계약을 기다렸을까? 지난 7월 말로 계약이 종료된 신태용 감독은 결국 작별 인사도 못한 채 대표팀을 떠나게 됐다. 신 감독은 6월 29일, 귀국 직후 인천공항에서 가진 해단식에서 자신의 거취를 언급하며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재계약에 대해선 신중하게 다가가야 하는데 아직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는 말로 미련을 나타냈다. 스스로 대표팀을 떠나지 못하고 협회의 결정을 기다리던 그는 결국 협회가 외국인 지도자로 방향을 정하면서 존재감 없이 대표팀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말았다. 일요신문 DB 1년여 동안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경질 이후 ‘소방수’로 투입됐던 그는 러시아월드컵 전후로 여론의 역풍을 그대로 맞으며 비난의 중심에 있었다. 월드컵 직후 사퇴 의사를 밝힐 거란 예상도 있었지만 신 감독은 협회의 결정에 자신의 거취를 맡겼고 결국 조용히 퇴장하고 말았다. 김판곤 위원장은 7월 19일부터 감독선임소위원회를 열어 신태용 감독이 이끈 대표팀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등 논의를 거쳤다고 밝혔다. 대표팀으로부터 전달 받은 모든 리포트를 바탕으로 경기 운영 방식, 선수단 운영, 코팅스태프와의 소통, 언론 대응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신태용호’를 진단한 결과 신 감독과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신태용 감독의 퇴진은 그를 따른 김남일, 차두리 코치 등 코칭스태프의 동반 사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신 감독은 왜 스스로 물러나는 방법 대신 협회의 결정을 기다렸던 걸까. 한 축구 관계자는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 먼저 계약 해지를 언급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협회도 외국인 감독과의 협상이 막판에 무산된다면 아시안컵대회만이라도 신 감독한테 맡기려 했을 것이다. 일종의 보험용으로 신 감독의 거취를 갖고 갔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축구 에이전트 A 씨는 이번 여름에 일본 J리그 구단 중 일부가 신 감독에게 오퍼를 보냈다는 얘기도 전했다. 신 감독이 그에 대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 감독은 최근 강원도 태백에서 열리고 있는 전국 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대회에 출전하는 아들 신재원(고려대)을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