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열도 분노케한 소년범들 ‘솜방망이 징역’ 후 출소…최근 주차시비 칼부림 등 범죄 저질러 재조명
살인미수로 체포된 미나토 노부하루는 약 30년 전 열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여고생 콘트리트 살인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이었다. 관련 내용이 실린 주간신조 9월 6일자 지면.
“너 대체 뭐하는 놈이야!” 일요일 저녁, 조용한 주택지에 고함이 울렸다. ‘쾅쾅’ 연거푸 자동차 보닛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남자의 몸싸움이 시작됐다. 올라탄 남성이 칼로 찌르자 상대가 놀라 목을 감쌌다. 순식간에 아스팔트가 선혈로 물들었다.
8월 19일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체포된 남성은 이웃주민의 어깨를 삼단봉으로 내리친 다음 목을 칼로 찌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조사에서 남성은 “흉기를 휘두른 것은 사실이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해당 사건에 대해, 수사관계자는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죄를 묻겠다”는 의지다.
살인미수죄의 법정형은 살인죄와 같은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대다수는 징역 3~7년이 구형된다. 아울러 정당한 사유 없이 칼날 길이가 6cm 이상인 칼을 소지했을 시 ‘총도법 위반’으로 2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이번 사건에서 남성이 사용한 칼은 접이식으로 칼날 길이가 8cm, 다 펼치면 전체 길이가 19cm나 되는 흉기였다.
1989년 1월 비참하게 살해당한 피해 여고생.
사건 발생은 1988년 11월 2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택으로 귀가 중이던 여고생(당시 17세)이 10대 남학생들에게 납치됐다. 범행에 가담한 소년들은 주범인 A(당시 18세)와 중학교 후배인 B(당시 17세), C(당시 15세), D(당시 16세) 등 4명이었다. 이들은 C가 부모와 동거하는 집을 아지트로 삼고, 2층에 여고생을 40여 일간 감금한 뒤 성폭행과 잔혹 행위를 일삼았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끔찍한 학대였다. 가해자 남학생들은 여고생의 성기에 이물질을 넣고, 다리에 불을 붙이는 등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깔깔 웃었다. 소변과 토사물, 바퀴벌레 등을 강제로 먹이는가 하면, 하루 18시간 이상 폭행과 성적고문을 가했다. 12월 하순, 소녀는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 빠졌다. 이즈음 동거하는 C의 부모가 소녀의 존재를 눈치 챘지만, 아들과 그 친구들의 보복이 두려워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소녀가 짧은 인생을 마친 것은 1989년 1월 4일. 전날 ‘내기 마작’에서 대패한 A는 나머지 3명을 꾀어 분풀이로 소녀를 폭행한다. 촛농을 얼굴에 떨어뜨리고, 약 1.6kg의 철아령을 소녀의 복부에 던졌다. 무려 2시간 동안 처참한 린치를 당한 소녀는 누운 채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다음날, 가해자 남학생들은 인근 공사장 드럼통에 시신을 넣은 뒤 콘크리트로 묻어버렸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더욱이 시신을 은폐하고 나서도 가해자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분노를 자아냈다. 그럼에도 범인 4명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소년법’의 보호를 받았다. 20년 이상 선고가 불가능한 소년법 적용에 의해, 재판 결과 A는 징역 20년, B는 5~10년, C는 5~9년, D는 5~7년의 형량이 선고됐다. 여기서 C가 바로 지난 8월 살인미수로 긴급 체포된 미나토 노부하루다.
주간문춘은 1989년 4월 20일자에서 여고생을 살해한 남학생 4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여고생 살인사건 발각 당시 일본 언론들은 피해자의 사진과 실명을 게재하며 사생활을 집요하게 보도했다. 그녀가 미인이라는 이유도 한몫했다. 연일 쏟아지는 자극적인 보도에 피해자에 관한 근거 없는 루머가 떠돌았고, 분노한 피해자의 아버지는 “집단적 과열 취재를 자제해달라”는 요청까지 하게 된다. 반면 가해자 남학생들은 소년법에 따라 실명이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천인공노할 잔혹범죄를 저지른 흉악범들에게 인권이란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일본 대중지 ‘주간문춘(1989년 4월 20일호)’이 4명의 실명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주간문춘’이 그때 실명을 공개한 이유는 4월 8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독자투고가 결정적이었다. 21세 대학생 독자는 이렇게 글을 남겼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가해자 소년들의 이름과 사진이 언론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미성년자여서 익명 보도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죽은 여고생은 이름도 사진도 심지어 주소까지도 신문에 실렸다. 같은 미성년이다. 그런데도 살해당한 이의 인권은 무시되는 한편, 가해자의 인권은 존중되고 있다.”
죄질에 비해 가해자 소년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소년법 개정에 대한 요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1997년 일어난 ‘고베 아동연쇄살인사건’을 거쳐서야 비로소 일본 소년법은 변화를 맞이한다. 형사처벌 연령이 ‘16세 이상’에서 ‘14세 이상’으로 낮춰진 것이다.
미나토는 출소 후 무에타이 선수로 데뷔하기도 했다.
앞서 일본 언론들은 관련 사건을 보도하긴 했지만, ‘여고생 콘트리트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은 언급은 하지 않았다. 저널리스트 도쿠오카 다카오 씨는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이번에 체포된 남성은 일본을 뒤흔든 강력사건의 범인이다. 재범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사회 전체적으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시민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범인이 어떤 내력을 가진 인물인지 독자나 시청자에게 알리는 것도 보도기관의 책임이다. 소년법 규정을 엄격히 해석해 ‘과거 사건은 일체 건드리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 왜 같은 범죄가 반복되는지 검증할 수 없다. 지금의 언론 보도는 한마디로 일그러진 인권옹호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미나토는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결심 공판에서 ‘피해자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 나는 아직 미숙하지만 제대로 반성하고 평생 속죄하며 살겠다’며 최종 진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살인미수혐의로 체포됐다. 과연 미나토는 속죄하며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주간신조’는 “피해자 유족들의 고통과 죄의 무거움을 깨달았다면 재범은 결코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일침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