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하면 ‘공공성 훼손’ 반대하면 ‘손해배상 소송’이 문제…“비영리병원 전환할 수도”
지난 2017년 3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녹지국제병원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 10월 4일 제주도 녹지국제병원 숙의형 공론조사위는 녹지국제병원 개설 불허를 권고하기로 결정했다. 제주도민 참여 배심원단 200명 중 180명이 참석한 공론조사위 최종 설문조사에서 58.9%(106명)가 ‘개설을 허가하면 안된다’고 응답하고 38.9%(70명)가 ‘개설을 허가해야 한다’고 답한 것. 나머지 2.2%(4명)는 판단을 유보했다. 공론조사위원회가 지난 4월 7일 구성된 후 6개월간 20여 차례의 공론조사를 진행하며 도출한 결과다.
녹지국제병원은 국내 최초로 외국 자본을 투입해 설립하는 영리병원(투자개방형병원)이다. 제주도는 제주자유도시 7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제주헬스케어타운 유치 과정에 녹지국제병원 설립을 추가, 복합의료관광단지를 조성할 것을 목표했다. 제주도민들 사이에선 병원 설립으로 도내 의료수준 향상과 지역경제 활성화, 일자리 창출 등의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나오기도 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관계자는 “당시 영리병원을 도입하려 했던 중앙정부의 의지와도 맞물렸다”며 “정부는 한 차례의 사례가 있어야 영리병원 도입에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판단, 제주도를 그 실험 사례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병원설립은 지난 2015년 12월 보건복지부(복지부)가 중국 기업인 녹지그룹이 제출한 녹지국제병원 사업계획서를 승인하면서 본격화됐다. 녹지그룹은 지난해 7월 서귀포시 토평동 제주 헬스케어타운에 병원건물을 완공, 의사·간호사 등 병원 인력을 채용하며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해 8월엔 제주도에 병원 개원 허가 신청서를 접수했다. 하지만 설립 반대 여론이 거세지면서 제주도는 개원 허가를 6차례나 연기, 결국 공론조사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공론조사 결과로 녹지국제병원 설립이 사실상 무산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더군다나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지난 10월 8일 오전 제주도청 주간정책회의에서 공론조사위 불허 권고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원 지사는 이날 “도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기보다 모든 이해관계자와 긴밀하게 협의를 해야 한다”며 “다양한 의견과 문제점들을 충분히 수렴해 검토, 협의하면서 향후 수습과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지난 8일 공론조사위원회의 불허 권고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박은숙 기자
그렇다고 개원을 허가하기엔 반대 여론이 거세다. 의료 공공성 훼손과 의료민영화 확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기 때문이다. 최종 공론조사에서 설립 불허 의견을 낸 배심원단들은 ‘다른 영리병원들의 개원으로 이어져 의료의 공공성이 악화될 것 같아서’(66.0%)를 반대 이유로 가장 많이 꼽았다. 지난 2015년 제주도청이 제주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제주영리병원 도입 여론조사’만 해도 응답자의 74%가 반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과 한국개발연구원은 이미 지난 2009년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도입 필요성 연구’ 보고서를 통해 “영리병원의 속성상 수익을 추구하기 위해 비급여 진료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우리나라의 국민의료비 지출 규모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영리병원 설립은 국민들의 의료서비스 접근 형평성에 장애를 유발할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제주도청도 이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일각에선 개원 여부 결정에 앞서 “녹지국제병원에 국내 자본이 우회투자 됐다”는 의혹부터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된다. 복지부가 사업계획서를 검토하던 당시 녹지국제병원 설립을 신청한 법인은 녹지그룹이 만든 한국 자회사이며, 제2투자자는 사실상 국내 성형외과병원이 운영하는 ‘서울리거’(병원경영지원업체)라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 녹지국제병원 운영을 국내 의료법인인 미래의료재단에 맡기려 한다는 정황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녹지그룹은 사업주체를 외국자본이 100% 출자한 법인으로 바꿔 설립 허가를 재신청, 같은 해 12월 복지부의 승인을 얻었다.
제주도민들은 녹지그룹에 대해서도 신뢰를 표하지 못하고 있다. 녹지그룹이 제주도 부지에 고층빌딩, 카지노 등을 설립한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결국 본인들 잇속만 챙기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녹지그룹이 제주도와 맺은 ‘제주도 특산물 500억 원 수출 양해각서(MOU)’를 이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볼멘소리도 높다. 오상원 의료영리화저지 제주도민 운동본부 정책기획국장은 “의료 공공성 훼손에 대한 우려는 항상 있어왔는데 최근 들어선 이들을 포함한 해외자본들이 결국 제주도에서 이득만 챙겨가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무성하다”고 말했다.
제주도청은 병원 개원과 관련해 아직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제주도청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이 없고 주민동향과 공론화위 권고안 등을 수렴해 유관부서들과 협의하고 있다”며 “개원 반대 시 건물부지와 채용된 직원들을 어떻게 할지 등도 논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절충안으로 녹지국제병원을 비영리병원으로 전환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앞서의 오상원 정책기획국장은 “도민들이 수년 동안 여러 차례 반대의사를 표명한 만큼 개원을 허가하거나 또 다시 찬반 조사를 진행하긴 부담이 있을 것”이라며 “녹지국제병원을 비영리병원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도가 병원을 매입해 고용문제 등을 함께 풀어나갈 것이란 이야기가 나온다”고 귀띔했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