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빕 명예가 죽음보다 중요한 다게스탄 출신…맥그리거의 조국 조롱 등이 불상사 불러
맹렬한 기세로 코너 맥그리거를 공격하는 하빕 누르마고메도프. 연합뉴스
[일요신문] 하빕이 맥그리거를 꺾었다. UFC 입성 뒤 무패를 자랑한 하빕 누르마고메도프와 역대급 복서 메이웨더와 복싱으로 맞붙었던 코너 맥그리거의 대결이라 경기 전부터 두 선수의 불꽃 튀는 언쟁은 또 다른 볼거리였다. 가장 화제가 된 것은 무패를 이어간 하빕의 승리보다 경기 뒤 펼쳐진 난투극이었다. 하빕은 맥그리거의 팀원을 경기장 밖으로 나가 공격했고, 하빕의 팀원이 맥그리거를 주먹으로 후려치며 난투극을 벌였다. 스포츠 정신을 망각한 사상초유의 사태에 챔피언 하빕과 도전자 맥그리거를 향한 날선 비난이 거세다. 하지만 하빕의 고향 캅카스 지역의 다게스탄 문화를 이해하면 이 난투극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6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UFC 229 메인이벤트는 ‘타격가’ 맥그리거와 ‘레슬러’ 하빕이라는 수식어를 그대로 반영하는 양상이 전개됐다. 맥그리거가 간간이 잽과 킥으로 분위기를 만들자 하빕은 곧장 달려들어 상대 오른쪽 다리를 잡고 밀어 붙였다.
2라운드에서는 반전이 일어났다. 타격에서 열세가 예상됐던 하빕이 강력한 라이트를 맥그리거의 얼굴에 꽂았다. 하빕은 맥그리거를 바닥에 메치고 무자비하게 주먹을 내리 꽂았다. 3라운드에서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던 경기는 4라운드에서 마무리됐다. 그라운드전을 유도한 하빕은 맥그리거의 등뒤에서 목을 조르며 서브미션 승리를 거뒀다. 목이 졸린 맥그리거는 힘없이 손을 토닥일 수밖에 없었다.
맥그리거의 항복에도 경기는 마무리되지 않았다. 하빕은 심판의 경기 종료를 알리는 제스처를 보고도 소리를 지른 후 이내 뒤 돌아서서 경기장 밖에 있던 맥그리거의 팀원에게 마우스피스를 집어 던졌다. 그는 말릴 새도 없이 경기장을 뛰어 넘더니 맥그리거 팀원에게 달려 들었다. 하빕의 팀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모든 눈이 하빕에게 쏠린 시점에서 맥그리거의 안면을 뒤에서 후려쳤다. 경기장은 쑥대밭이 됐다.
난투극은 애초 예견됐었다. 이전부터 두 선수 사이에서 벌어지던 설전은 지난 4월 ‘버스 습격’으로 폭발했다. 하빕은 앞선 인터뷰에서 자신을 모욕했던 맥그리거 팀원 아르템 로보프를 호텔 복도에서 마주치자 따귀를 때리며 위협했다.
이틀 뒤 맥그리거는 하빕을 포함해 UFC 223에 나설 일부 선수가 탄 버스를 습격했다. 맥그리거는 버스 창문에 퍼붓던 주먹질과 욕설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철제 카트를 내던졌다. 유리창이 깨지며 파편이 튀었고 애꿎은 선수만 찰과상을 입었다.
하빕 누르마고메도프의 고향 러시아 다게스탄 인근 지역. 디자인=백소연 디자이너
캅카스 지역은 남쪽으로 터키와 이란, 북쪽으로 러시아를 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산악 지역 명칭이다. 언뜻 보면 정식국가로 인정되는 러시아와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4개국이 전부인 것 같지만 실제 이 지역은 미승인국가를 포함 17개국이 뭉쳐있는 형태를 띤다. 다게스탄 역시 러시아연방이긴 하지만 하나의 국가로 볼 정도로 자치정부가 굳건한 동네다.
17개국이 전부가 아니다. 유럽 지역과 러시아, 중동이 맞붙은 지역이라 서른 갈래에 가까운 소수 민족이 분포돼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자치 정부를 꾸리려 전쟁도 불사하는 등 유혈 충돌 사태가 계속 발생한다. 민족 지키기에 혈안이 된 동네다 보니 캅카스 민족의 뿌리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주변 강대국에게 자주 인종청소를 당했지만 끝까지 살아 남은 민족이었다. 캅카스를 정복하러 간 나라는 모두 망했다. 로마·페르시아, 비잔틴·이슬람제국, 십자군·아랍 제국, 러시아·오스만투르크·페르시아 등 강대국도 피해갈 수 없었다. “왕이 미치면 캅카스로 전쟁하러 간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체첸 사태가 이 동네에서 발발했다. 다게스탄은 체첸 바로 옆에 붙은 지역이다. 체첸의 전투 성향을 쏙 빼닮은 지역이기도 하다. 더 주목할 건 다게스탄 민족의 성향이다. 다게스탄은 근본주의 이슬람을 표방하는 와하비즘 신봉 세력의 본거지다. 여성 차별과 동성애 혐오로도 악명 높다. 러시아 대륙의 신체 조건과 이슬람 근본주의, 산지의 폐쇄성이 어우러진 캅카스인은 가문의 명예를 가장 중요시한다. 가문의 치욕은 살인으로 이어진다. 어느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복수는 계속된다. 러시아 주요 갱단은 캅카스 사람으로 채워져 있다고 알려질 정도다.
데이나 화이트 UFC 대표는 경기 뒤 “하빕에게 징계를 내리지 않을 것이나 모든 건 체육위원회에게 달렸다. 만약 하빕이 장기간 징계를 당해서 경기를 못 뛰게 된다면 챔피언 벨트를 박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빕은 “나는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다. 격투기는 도발을 주고받는 것이 아닌 존중을 보이는 스포츠여야 한다. 변질된 격투기를 다시 바꾸고 싶다”며 “떠나야 한다면 무패의 챔피언으로 떠나겠다”고 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하빕이 쓰고 등장하는 ‘가발’의 정체는? UFC 라이트급 챔피언 하빕 누르마고메도프는 경기 등장할 때마다 머리에 커다란 가발과 같은 형태의 무언가를 뒤집어 쓰고 등장한다.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이 물체는 지난 6일 열린 하빕과 맥그리거의 UFC 229에서도 많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흑인 특유의 곱슬거리는 모발을 빗어 세운 머리인 ‘아프로헤어’를 연상케 하는 이것은 가발이 아닌 모자의 일종이다. 이는 파파카(papakha)라고 불리는 동유럽과 서아시아 캅카스 지방의 양모 모자다. 과거 전투가 일어나면 다게스탄 전사가 쓰던 모자로 알려져 있다. 하빕도 언론 인터뷰에서 “파파카는 내 뿌리가 어디인지를 나타낸다. 나는 다게스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설명한 바 있다. 격투기 파이터들은 종종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의상이나 소품을 착용하고 경기장에 등장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태권도나 유도 도복 또한 파이터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의상이 되기도 한다. 하빕은 이처럼 파파카를 착용할 정도로 자신의 조국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타이틀 방어전이 하빕의 서브미션 승리로 끝난 현재, 결과적으로 맥그리거는 하빕의 조국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른다.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