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차 기술 선점 위해 IT업체와 협업 확대하고 삼성·네이버 출신 등 외부 수혈…‘정통 현대맨’ 입지 축소
‘쇳물부터 자동차까지’ 수직 계열화를 이끈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순혈주의는 이미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진부해지고 있다. 정의선 부회장은 미래차 기술을 선점해 미래차 시장에 일찍 대응하려 한다. 협업의 확대, 외부 인재 수혈은 정 부회장이 꺼낸 방법론이다. 이 때문에 순혈주의를 이끈 정통 현대맨의 지위는 낮아지고 있다.
지난 9월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한 정의선 부회장은 최근 임원 인사에서 순혈주의 탈피를 ‘선언’했다. 특히 승진 전부터 미래 혁신 기술 분야에 대응하기 위해 꾸린 전락기술본부의 외부 인사 수혈을 통한 몸집 확장이 순혈주의 탈피를 선도하고 있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출신 지영조 부사장이 이끄는 전략기술본부에는 이번 인사로 네이버랩스 출신 김정희 이사가 합류했다. 김 이사는 현대차그룹에서 인공지능(AI)을 전담할 별도 신설 조직인 ‘에어랩(AIR Lab)’을 맡는다. 또 상품전략본부장에는 BMW 출신 인사가 앉았다.
세계 최대 규모 가전·IT 박람회인 ‘CES 2018’에 참석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현대자동차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와 함께 현대차그룹 내부 권력 변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그룹 기술 순혈주의 핵심으로 꼽혔던 남양연구소의 지위가 낮아지고 있다. 그룹 관심이 선행기술 개발로 쏠리고 있음에도 남양연구소가 독자 개발 노선을 지속해 온 게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있다. 현대차그룹이 자율주행차 시장 활성화를 위해 국내 정보통신(IT) 업체 기술 활용에 나서면서도 협업 단계로 확대하지 않았던 데는 남양연구소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10월까지도 양웅철 현대·기아차 연구개발총괄 부회장은 남양연구소에서 열린 R&D 아이디어 페스티벌에 나와 “음성 인식 기술과 관련해 제휴 업체를 정하지 않고 서버형 음석 인식 기술을 자체 개발해 서비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양 부회장의 발언은 정의선 부회장이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 ‘CES 2018’에 참석해 “누가 먼저 변화하는지가 살아남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이 될 것 같다”면서 “현대차의 파트너는 IT 기업”이라고 강조한 것과 대조된다.
그 사이 선행기술 연구를 주로 담당한 의왕연구소 출신 인사들이 전략기술본부로 대거 편입됐다. 현대차그룹 내부 관계자는 “독자 개발 노선을 구축해 온 양웅철 부회장 등 이른바 올드보이들과 정의선 부회장 간 노선 차이가 분명한 상황”이라며 “덕분에 전략기술본부 산하 미래기술전략실 등 주요 사업 부문 리더는 외부 인사가 맡고, 대부분 실무진도 의왕연구소 인원들로 채워졌다”고 말했다.
정 부회장은 시시각각 변하는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에서 직접 기술 개발보다 외부 기술 도입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의 외부 인사 수혈은 향후 미래차 시장 대응을 위한 정지작업인 셈이다. 실제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과 차량 공유 등 자동차의 ‘이동성’에 초점을 두고 올해 국내·외 기업들의 기술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해외 기술 업체 8곳에 약 241억 4800만 원을 투자, 협업 계약을 맺었다. 2016년 현대차그룹이 커넥티드 카(Connected Car) 개발을 위해 네트워크 업체 ‘시스코’와 협업을 결정한 이후 지난해까지 AI 기반 자율주행차 개발에서 독자행보를 고수해 온 것과 대조된다.
양웅철 현대자동차 부회장이 경기도 성남시 판교 창조경제밸리 기업지원 허브에서 열린 미래차 산업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 부회장이 또 로봇·인공지능(AI) 등 미래차 개발에 5년간 23조 원을 투자한다고 밝히면서 현대차그룹 내 핵심 부서로 자리매김해 온 기획조정실 입지도 줄고 있다. 글로벌 기술 보유 기업과 전략적 제휴나 협업이 전략기술본부 산하 ‘오픈 이노베이션 센터’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데 따른 결과다. 전략기술본부는 지난해 2월 출범한 정의선 부회장 직속 조직으로, ‘협업을 통한 혁신’을 의미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은 정의선 부회장이 최근 들어 가장 강조하는 원칙으로 알려졌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돈이 몰리는 곳이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면서 “과거와 달리 컨트롤타워로서 현대차그룹 기조실 역할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편 현대·기아차는 올해 들어 지난 9월까지 총 543만 7473대를 판매하며 올해 초 세운 판매 목표의 72%를 채우는 데 그쳤다. 남은 석 달 동안 판매 목표 755만 대를 채우기는 어려워졌다. 현대·기아차는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판매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현대차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차량 구매 흐름 변화가 공유차, 자율주행차, 전기차 등으로 빨라지고 있는 데 따라 정 부회장이 현재의 위기를 미래차로 넘으려 하고 있다”며 “정몽구 회장 아래서 물량 배분, 신차 투입 시기, 시장점유율 등 외형 성장에 치중하느라 외부보다 내부 인력을 우선 활용했던 현대차가 외부 인력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큰 변화”라고 말했다.
배동주 기자 ju@ilyo.co.kr
‘외국인 임원 약진’ 외부인재 수혈 살펴보니… 정의선 부회장은 승진 후 꺼낸 첫 조직개편의 방점을 외부 인사의 임원 전진 배치에 찍었다. 정 부회장은 그동안 글로벌 전문가 14명을 외부에서 영입했고, 이번 인사에서 외부 전문가 4명을 그룹 주요 임원에 임명했다. 특히 외국인 임원 약진이 두드러졌다. 지난 30일 현대차그룹 임원 인사에 따르면 정 부회장은 현대·기아차 고성능사업부장 토마스 쉬미에라 부사장을 상품전략본부장에 올렸다. 쉬미에라 부사장은 BMW M 출신으로 지난 3월 합류, 고성능차 사업과 영업·마케팅 부문을 맡아왔다. 현대·기아차 디자인 최고책임자(CDO)에는 폴크스바겐 출신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이 임명됐다. 이로써 2015년 2명에 불과했던 현대·기아차 외국인 임원은 올해 10명으로 5배 증가했다. 현대차그룹은 외국인 임원 외에도 삼성전자, 네이버 등 IT 기업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영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