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는 우리가 만들어간다” 여권신장 사회적 분위기 타고 둥실
#드라마 제목을 보면 주인공이 보인다?
2010년 이전에는 여배우를 중심에 세운 드라마가 많았다. 제목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 ‘선덕여왕’ ‘다모’ ‘황진이’ 등 이미 드라마의 제목 속에 여성 주인공이 명시됐다. 이 드라마들은 40% 안팎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안방극장에서 여성상위시대를 공고히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여배우들은 조력자로 전락했다. 가장 큰 이유는 ‘한류’(韓流)다. 남녀 배우 모두 일본,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모았지만 성비 불균형은 심했다. 남자 배우들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일본 시장을 장악한 배용준, 장근석뿐만 아니라 중국 시장의 선두주자였던 이민호, 김수현, 송중기, 이종석 모두 남성이었다. 때문에 남자 배우들이 출연하는 드라마는 해외에 높은 가격을 받고 수출할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논리로 인해 대다수의 드라마가 남성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풀어가고, 이 과정에서 여배우들의 비중은 크게 축소됐다.
드라마 ‘미스 마, 복수의 화신’에서 김윤진. 사진 출처 = SBS ‘미스 마, 복수의 여신’ 홈페이지
하지만 비슷한 느낌의 로맨틱 코미디가 판을 치며 인기가 시들해지자 다시금 여성 캐릭터에 무게중심을 둔 드라마들이 등장하고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또, 오해영’ ‘품위있는 그녀’ ‘힘센여자 도봉순’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도 19년 만에 국내 드라마에 복귀한 배우 김윤진이 SBS ‘미스 마, 복수의 여신’의 타이틀롤을 맡고 있고, ‘품위있는 그녀’로 건재함을 과시한 김희선 역시 tvN ‘나인룸’을 최전선에서 이끌고 있다. 이 외에도 KBS 2TV ‘차달래 부인의 사랑’, SBS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JTBC ‘뷰티 인사이드’, tvN ‘아는 와이프’, tvN ‘김비서가 왜 그럴까’ 등 여성 캐릭터에 방점을 찍는 드라마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여권 신장과도 연결 지어 설명할 수 있다. 실생활 속에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가 주변인에 그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남성보다는 여성이라는 것도 최근 여성 중심 드라마가 대거 기획되는 이유다. 한 중견 외주제작사 대표는 “여성들이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와 캐릭터에 이미 시청자들이 지친 상태”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현실성과 판타지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하며 여성 시청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여성 캐릭터 중심 드라마가 지지를 받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센 언니’들의 향연
2000년대 초·중반에는 ‘여걸식스’ ‘삼색녀 토크쇼’ 등 여성 MC들을 활용한 예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 중반 이후 스튜디오를 벗어나 야외에서 벌어지는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가 열리며 여성 예능인들의 입지가 좁아졌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의 엄청난 성공은 남성을 활용하는 예능으로 무게추가 급격히 기우는 계기였다. 이후 남성들을 포진시킨 예능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여성들은 점점 더 변두리로 밀려났다. 게다가 신인 여배우나 걸그룹 멤버들을 앉히는 예능 포맷이 보편화되면서 전문적인 여성 예능인들은 더욱 위축됐다.
하지만 올해는 여성 예능인들이 바닥을 찍고 도약하는 턴어라운드 시기였다. 그 중심에는 ‘큰 언니’ 격인 이영자가 있다. 이영자는 장기간 방송가의 대세 아이템이었던 ‘먹방’을 통해 또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MBC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각종 고속도로 휴게소 음식으로 대중의 침샘을 자극했고, 그 인기는 케이블채널 올리브 ‘밥블레스유’로 이어졌다. 그동안 KBS 2TV ‘안녕하세요’를 장기 진행하며 응축시켰던 이영자의 내공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케이블채널 올리브 ‘밥블레스유’에서 찰떡 호흡을 과시하고 있는 여성 방송인들. 왼쪽부터 최화정, 송은이, 김숙, 이영자. 사진 출처 = 올리브 ‘밥블레스유’ 홈페이지
‘젊은 피’ 중에서는 박나래도 단연 눈에 띈다. 스탠딩 개그 프로그램인 tvN ‘코미디 빅리그’부터 리얼 버라이어티인 MBC ‘나 혼자 산다’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그에게는 ‘대세’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박나래는 이미 이영자와 함께 올해 연말 열리는 MBC ‘연예대상’의 유력한 대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송은이와 김숙의 역할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요즘 크리에이터로 더 주목받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 2015년 콘텐츠 제작사인 ‘콘텐츠랩 비보’를 설립하고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그 결과 그들은 판을 깔아주는 프로그램에 ‘쓰이는’ 예능인이 아니라, 스스로 판을 ‘까는’ 크리에이터로서 인정받았다. ‘미투’ 가해자로 지목돼 지금은 활동을 중단한 방송인 김생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한 ‘영수증’ 역시 송은이와 김숙의 웹 콘텐츠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외에도 MBC ‘라디오스타’를 벤치마킹한 여성들의 토크쇼인 MBC에브리원 ‘비디오스타’는 김숙과 박나래가 이끌고 있고, 송은이·신봉선·김영희·김신영·안영미 등이 뭉친 걸그룹 셀럽파이브가 인기를 끄는 등 예능가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한 지상파 예능국 PD는 “이영자, 박나래, 김숙 등 성공사례가 나오자 여성 MC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등 새로운 트렌드가 생긴 것”이라며 “대중 역시 호응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여성 예능인들의 강세가 이어질 것이다”고 내다봤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