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인력 도둑 맞아도 입증 어려움 탓 ‘벙어리 냉가슴’…승소 확률도 낮아
그러나 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최근 일부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대해 기술 유용 및 불공정거래를 한 사례가 다수 드러나면서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4차산업혁명위원회 출범식 및 제1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스타트업은 사실상 대기업에 도시락 같은 존재다.” IT업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관계를 이 한 마디로 정리했다. 대기업이 마음만 먹으면 스타트업의 기술을 도용하거나 인력을 빼가는 등 ‘갑질’을 할 수 있다는 것. 이 관계자는 “스타트업이 개발한 서비스를 대기업이 제값을 주고 인수하면 다행”이라며 “대기업은 자본력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기술을 도용하거나 인력을 빼가 카피캣(모방 상품)을 내놓을 수 있다”고 전했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도용, 카피캣을 내놓는 것은 스타트업 생태계를 파괴하는 대표적인 ‘갑질’로 꼽힌다. 카피캣과 관련해 가장 많이 회자되는 사건은 2016년 불거진 SK커뮤니케이션즈의 스마트폰 앱 ‘싸이메라’의 필터 저작권 논란이다. ‘싸이메라’가 무료로 출시한 신규 필터와 그 콘셉트가 스타트업 오디너리팩토리가 유료판매하던 앱 ‘아날로그 시리즈’와 비슷했기 때문.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고 비판이 거세지자 SK커뮤니케이션즈의 ‘싸이메라’는 해당 필터 서비스를 일주일 만에 종료했다.
오디너리팩토리는 SK커뮤니케이션즈가 카메라 필터를 도용하며 다운로드 수가 감소해 피해를 봤다는 이유로 2016년 6월 SK커뮤니케이션즈를 고소했다. 2년간의 긴 소송 끝에 지난 2월 재판부가 손을 들어준 쪽은 SK커뮤니케이션즈였다. 재판부는 “피고가 원고 앱에 사용된 필터값을 이용했다는 점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재판부는 오디너리팩토리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기각했고, 원고가 항소를 포기해 소송 결과가 확정됐다.
KT와 상표권 분쟁을 했던 스타트업 이앤비소프트 또한 상표침해 금지 등 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 문서관리 앱 ‘클립클립’을 개발한 이앤비소프트는 2012년 KT와 3년간의 상호 비밀유지협약을 체결하고 협력했다. 그러나 계약 종료 시점이 2주가량 지난 2015년 4월 KT는 ‘클립’ 상표출원을 완료하고 그해 8월 모바일 지갑 앱 ‘클립’을 출시했다. 문제는 KT가 신규 출시한 앱과 이앤비소프트 앱의 명칭·로고 모양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2016년 1월 이앤비소프트는 “KT가 상표권을 침해했다”며 “상표를 이용한 영업을 금지하고, 1억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고 소송을 냈다. 같은 날 KT는 ‘클립’ 앱 로고 상단의 클립모양 디자인을 ‘하트’로 변경했다. 또 한 달 뒤 이앤비소프트 측에 공문을 보내 ‘비금전적 협업 방안 논의가 열려 있다’고 알렸다. 공문에는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사는 항상 대·중소기업 상생을 당사의 우선가치 중 하나로 해왔다”며 “따라서 여전히 귀사에게도 가능한 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후 협업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같은 논란과 분쟁이 계속되는 까닭은 대기업이 스타트업이 개발한 서비스를 제값에 인수하기는커녕 오히려 스타트업의 인력과 기술을 빼가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이 스타트업의 기술과 서비스를 거저 인수하려는 것이 문제”라며 “스타트업이 대기업의 제안을 거절하면 대기업은 ‘카피캣’을 만들어 ‘오리지널 부수기’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스타트업 및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기술 탈취가 이뤄지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고발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 10월 15일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감에서 송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중소벤처기업부에서 받은 실태조사 보고서를 근거로 “기술 탈취 증거 입증 책임을 중소기업에 지우는 현행 소송 방식으로는 대기업의 대표적 ‘갑질’인 기술 탈취를 근절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6년간 중소기업의 기술 유출 피해 건수는 701건, 피해 금액은 9570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기술 유출이 발생했을 때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고발하거나 수사의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는 19.4%에 불과했다. 응답자 가운데 66%는 특별한 조치를 하지 못한 이유로 ‘유출 입증의 어려움’을 들었다.
스타트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는 비단 기술 유용에 그치지 않는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비용 후려치기 ▲제공된 정보의 공동지적재산권 강요 ▲장기간 저가 제공 강요 등의 불공정 계약도 대기업 갑질이라고 호소한다. 국내 최대 스타트업단체 코리아스타트업포럼(코스포)은 지난 5월 비공개 회원사 정기포럼을 통해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불공정거래에 대해 논의했다.
코스포 법률특허분과 구태언 단장은 “대부분 스타트업과 대기업 간 관계가 표면적으로 ‘제휴’ ‘협력’이지만 사실상 하도급일 경우가 많아 기술유용 문제가 빈번히 발생할 수 있다”며 “현실적으로 스타트업이 문제를 제기할 경우 대기업과 거래 기회 자체를 뺏길 수 있어 이를 주저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모 대기업 통신사를 하도급법 위반 및 기술탈취 등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던 한 IT 중소기업은 이후 해당 대기업과 거래를 재개하고 나서는 언론에 이 내용이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 대기업과 거래를 이어나가게 된 상황에서 논란이 재점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 이 두 기업은 현재 신규계약을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에서는 모 IT 대기업이 스타트업 대표와 개발자를 대거 채용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분참여 등을 통한 투자 대신 아예 핵심인력을 영입하면 사업 아이디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 IT업계 다른 관계자는 “IT 대기업 리더급엔 스타트업 대표나 개발자 출신이 많다”며 “대기업들이 스타트업에 투자하거나 사업을 인수하기보다 그곳 핵심인력을 데려가 적은 비용으로 이들이 준비하거나 운영하던 사업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벤처기업부 옴부즈만을 지낸 김문겸 숭실대 벤처중소기업학과 교수는 “대부분 혁신은 스타트업에서 시작되고, 사업이 성공하려면 대기업의 글로벌 네트워크나 마케팅이 필요하다”며 “그런데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제값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기술과 사람을 빼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공정위 등에서 스타트업에 대한 대기업의 기술·인력 탈취 등을 강력하게 제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기술 훔쳐가기’ 공공기관도 마찬가지 스타트업 생태계를 보호해야 할 정부·공공기관까지 스타트업에 ‘갑질’을 일삼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배재광 인스타페이 대표는 올해를 포함해 3년째 국감에 출석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전력공사(한전)가 인스타페이가 개발한 전기요금 스마트폰 납부 서비스 특허를 침해했다는 것. 올해 국감에서 배 대표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서비스를 못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스타페이는 2013년 한전에 스마트폰 납부 서비스를 제안했으나 한전 측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전은 2016년 2월 카카오페이와 함께 인스타페이가 제안한 서비스와 비슷한 ‘카카오페이 청구서 서비스’를 내놨다. 인스타페이는 자사가 제안한 서비스를 한전이 카카오에 유출했다고 주장하며 특허권침해금지가처분을 신청했다. 반면 카카오는 특허심판원에 인스타페이 특허등록무효 심판을 제기했다. 승자는 대기업인 카카오다. 지난 13일 특허등록무효 소송에서 카카오가 승소한 것. 카카오 관계자는 “특허등록무효 소송은 승소했으나 나머지 한 건(특허권침해금지 소송)이 아직 진행 중이라 별다른 입장을 밝힐 수 없다”고 전했다. 배재광 대표는 “한전은 카카오에 소송을 맡겼는데, 1심에서는 우리 측이 이겼지만 2심에서 카카오가 대형 로펌 김앤장을 소송대리인으로 내세우면서 어려운 싸움이 됐다”고 전했다. 이어 “한전뿐 아니라 행정안전부 또한 2013년 우리가 제안한 기술을 2017년 자체개발했다면서 같은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며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이나 똑같이 기술 탈취를 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스타트업 ㈜유라이크코리아는 지난 8월 농촌진흥청에 대해 법적 대응 계획을 밝혔다. 유라이크코리아가 개발해 서비스 중인 축우 관리 시스템 ‘라이브케어’가 농촌진흥청이 개발했다고 밝힌 축우 관리 시스템과 유사하다는 것. 유라이크코리아에 따르면 농촌진흥청 산하 국립축산과학원에서는 2016년과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라이브케어’의 기술을 문의하거나 자료를 요청했다. 유라이크 측은 “농진청이 ‘라이브케어’ 제품을 알면서도 관련 기술을 현장에 공급하겠다는 것은 명백히 스타트업 죽이기”라며 “농진청이 사업을 철회하지 않으면 강력한 법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농촌진흥청은 농촌진흥청 제품과 유라이크코리아 제품이 분명한 기술 차이가 있으므로 특허침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섰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특허 침해 여부 확인을 위해 특허청 특허심판원에 ‘권리 범위 확인 심판’을 청구했다”며 “공공기관이다보니 기술적 부분에 제기된 문제의 진위 여부를 가려야 추후 대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유라이크코리아, 중소벤처기업부와 함께 여러 차례 협의를 했다”며 “이번 건에 대해 법적으로 진위 여부를 따지되 사업적 측면에서는 좋은 기술을 보유한 유라이크코리아 등 기업들과 협력, 협조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