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승왕 출신’ 장원삼·배영수 새둥지 찾아…임창용 방출 당하자 팬 ‘감독 퇴진운동’ 후폭풍
겨울에 팀을 떠나게 되는 선수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입단 후 수년이 지나도록 1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거나 성장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만년 유망주’, 그리고 한때 1군에서 오래 뛰었지만 더이상 예전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베테랑들이다.
올해도 그랬다.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총 73명 안에 다승왕 출신 투수 두 명이 포함돼 있다. 삼성에서 뛰던 왼손 투수 장원삼(35)과 한화 소속이던 오른손 투수 배영수(37)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노련미를 과시했던 현역 최고령 투수 임창용(42) 역시 KIA와 재계약하지 못했다. 점점 더 많은 구단이 ‘세대교체’와 ‘내부 육성’을 당면 과제로 내세우는 상황이라 베테랑 선수들은 ‘팀 방향성’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수록 설 자리가 좁아진다.
배영수. 사진 제공 : 두산 베어스
# 새로운 기회 잡은 장원삼과 배영수
물론 장원삼과 배영수에게는 방출이 새로운 출발의 기회가 됐다. 스스로 원해서 팀을 나온 장원삼에게는 더 그렇다. 그는 2006년 현대에 입단해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2010년부터 삼성에서 뛰었다. 2011∼2014시즌 삼성의 정규시즌·한국시리즈 통합 4연패의 주역이기도 했다. 개인 통산 성적은 346경기 121승 9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4.17. KBO 리그 개인 통산 다승 순위 16위에 올라 있다. 2012년엔 17승을 올려 다승왕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부터 부진이 이어졌고, 올해는 부상으로 1군에서 단 8경기만 등판해 3승 1패 평균자책점 6.16으로 부진했다. 삼성이 세대교체에 속도를 내면서 장원삼이 설 자리도 점점 줄었다. ‘뛸 기회’를 간절하게 바랐던 장원삼은 결국 구단에 방출 요청을 했다. 삼성 역시 장원삼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방출 요청을 받아 들였다.
그런 장원삼을 이끈 구단이 바로 LG다. 현재 LG 사령탑은 장원삼의 전성기를 함께한 류중일 전 삼성 감독이다. 장원삼이라는 투수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올 시즌을 끝으로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은 장원삼은 FA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LG로 향했다. 세 번째 팀에서 명예회복 기회를 노리게 됐다.
배영수는 프로 통산 137승을 올린 현역 최다승 투수다. 한때 삼성에서 장원삼과 한솥밥도 먹었다. 2000년 삼성에 입단한 뒤 이듬해인 2001년부터 삼성 에이스로 활약했다. 2004년엔 17승으로 다승 1위에 오르면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2000년대 초반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속구 투수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2007년 1월 오른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고 1년을 통째로 쉰 뒤에는 구종을 다양화해 투구 스타일에 변화를 줬다. 그 후 꾸준히 삼성 마운드의 한 축으로 활약하면서 124승을 쌓아 올렸다.
심수창. LG 트윈스 제공
무엇보다 장원삼과 배영수는 모두 투수 친화적인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게 되는 행운을 잡았다. 타석에서 외야 펜스까지 거리가 가장 먼 잠실구장은 투수들이 홈런에 대한 부담 없이 가장 자신의 기량을 잘 펼칠 수 있는 야구장으로 꼽힌다. 구속보다 제구 위주로 승부하는 베테랑 투수들에게는 더 그렇다. 특히 배영수는 리그 최강으로 꼽히는 두산 야수진을 등 뒤에 두고 마운드에 오른다. ‘전화위복’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이 둘 외에도 한화에서 방출된 오른손 투수 심수창(37)이 7년 만에 친정팀 LG로 컴백하게 됐다. 심수창은 2004년 LG에 입단했지만 2011년 8월 넥센으로 트레이드됐고, 2013년에는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롯데로 이적했다. 2015시즌을 마친 뒤에는 FA 자격을 얻어 한화와 계약했다. 하지만 계약 마지막 해인 올 시즌 1군 3경기에서 2⅓이닝을 던지는 데 그쳤다. 퓨처스리그에서는 18세이브로 구원왕에 올랐지만, 한화의 확고한 세대교체 방침 속에 설 자리를 잃었다. 끝내 구단에 방출을 요청했고, 한동안 기회를 기다리다 LG의 부름을 받았다.
# 거센 후폭풍 낳았던 임창용의 방출
사이드암 임창용의 방출은 이보다 훨씬 큰 후폭풍도 일으켰다. KIA는 정규시즌이 끝난 뒤 임창용을 전력 외로 분류했다. 조계현 KIA 단장이 직접 임창용을 만나 재계약 포기 의사를 전했다. 문제는 그 후였다. 임창용이 팀을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이 들고 일어났다. 일부 팬들은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를 항의 방문했고, 온라인에 김기태 감독 퇴진을 기원하는 웹사이트까지 만들어 단체 행동에 나섰다. 임창용이 KIA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 선수라는 뜻에서다.
임창용은 1995년 KIA의 전신 해태에 입단한 뒤 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모기업이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4년 만인 1999년 삼성으로 현금 트레이드됐다. KIA 팬들은 당시 상황을 놓고 “광주 출신인 임창용이 팀을 위해 대구로 팔려 갔다”고 표현하고 있다. 임창용은 삼성에서 선발과 불펜을 가리지 않고 등판해 ‘애니콜’이란 애칭을 얻었고, 일본 야쿠르트에서 5년,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에서 1년간 각각 뛰기도 했다. 이후 2014년 삼성으로 돌아와 2015년 구원왕에 올랐지만, 해외 원정 도박 파문에 휘말려 2년 만에 방출됐다. 그런 그에게 KIA가 손을 내밀면서 18년 만에 친정팀 유니폼을 다시 입었다.
한미일 프로야구 통산 1000경기 출장을 기록한 투수 임창용. 사진 출처 = KIA 타이거즈 홈페이지
하지만 시즌 도중 보직을 바꾸고 2군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김기태 감독, 이대진 투수코치와 불화설에 휩싸인 게 문제였다. 선발 투수 자리를 먼저 원한 건 임창용이었지만, KIA 팬들은 “김 감독이 무리하게 임창용을 선발로 내보내다가 문제가 생겼다”고 오해한 것이다. 임창용에게 코치직을 제의하지 않은 데 대해서도 억측이 쏟아졌다. KIA는 이에 대해 “임창용이 현역 선수로 더 뛰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했다”며 “그런 상황에서 코치직이나 은퇴식을 제의하는 게 더 예의가 아니라고 봤다”고 해명했다.
그래도 KIA팬들의 성난 마음은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시즌 종료 기념행사를 앞두고 야구장 입구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원색적인 문구가 쓰인 조화를 세워 두고, 마스크를 쓴 채 감독 퇴진을 요구했다. 행사 참석을 위해 야구장을 찾았던 김 감독이 직접 팬 대표 한 명을 감독실로 불러 오해를 풀기 위한 대화를 나눴을 정도다. 시간이 지나면서 폭풍은 다소 잠잠해졌지만, 아직 불씨는 남아 있다. 임창용의 향후 거취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 관심 받지 못하는 베테랑들은 더 춥다
어차피 1군에서 뛸 수 있는 선수 수는 정해져 있다. KBO 리그 10개 구단은 매년 10명 안팎의 신인 선수들을 맞아들이고, 등록 선수는 구단 별로 65명을 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인원수는 정해져 있는데 새로운 식구가 입단한다면, 누군가 그 수만큼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한때 스타플레이어로 군림했다 하더라도 소속팀에서 더 이상 자리가 없다고 판단하면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장원삼이나 심수창처럼 먼저 방출을 요청해 새 길을 알아볼 수도 있고, 올해 은퇴한 KT 박기혁과 홍성용, SK 이대수, NC 이종욱처럼 구단의 권유를 받아들여 곧바로 프로 코치 자리를 얻을 수도 있다. 둘 다 여의치 않다면 그 다음 길은 구단 프런트로 변신해 일단 다른 분야의 경험을 쌓는 것이다. 이 정도는 그동안 팀 성적에 공헌이 많은 선수들에게 구단이 해줄 수 있는 배려다.
그러나 세 가지 갈림길에 설 수 있는 선수들 역시 지극히 한정적이다. 앞서 언급한 선수들처럼 방출 소식이 대대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부러워하는 베테랑들이 더 많다. 2년 전 은퇴 후 구단에서 전력분석원으로 새 인생을 시작한 야구 관계자 A 씨는 “처음에는 내가 보류선수 명단에서 빠져 은퇴했다는 것을 아예 몰랐던 사람도 많았다”며 “전력분석을 하러 간 다른 팀 구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야구 관계자가 ‘왜 여기서 사복을 입고 있느냐. 소속팀 경기 없느냐’고 물은 적도 있다”고 털어 놓았다.
나이가 꽉 찼는데 아직 보여준 게 별로 없는 선수들은 매년 보류선수 명단 제출 시기가 올 때마다 불안해하는 게 당연하다. 오랜 기간 유망주로만 지내다 어렵게 주전으로 자리 잡은 B 투수는 “2군에 있던 시절엔 시즌이 끝난 뒤부터 보류 선수 명단이 발표되기 전까지 한 달 정도는 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마음이 불안정했다”며 “친구들을 만나도 신세한탄만 하게 되고 운동을 해도 목적이 확실하지 않으니 집중이 잘 안 됐다”고 털어놓았다.
선수 스스로 ‘나갈’ 때가 왔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어떤 포지션에서 어떤 유형의 신인들이 뽑혔는지 살펴보기만 해도 자신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과 함께 벤치에 앉아 있는 베테랑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면, 구단의 방향성도 충분히 짐작한다. 국가대표급 기량을 자랑했던 베테랑 C 선수는 “사실 선수 한 명이 은퇴할 때는 그 선수를 ‘은퇴하게 만드는’ 후배 한 명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딱 보면 ‘아, 저 친구가 나를 은퇴시키겠구나’하고 짐작할 수 있다”며 “어떤 신인 선수 한 명을 보고 나 역시 서서히 뒤로 물러설 때가 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왜 방출됐을까’ 성영훈과 성시헌의 속사정 베테랑에게만 추운 겨울이 아니다. 올해 보류 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선수들 가운데는 유독 눈에 띄는 투수 두 명이 있다. 두산은 ‘아픈 손가락’ 성영훈(28)과의 재계약을 끝내 포기했다. 성영훈은 2009년 두산이 1차지명으로 뽑은 투수다. 쟁쟁한 유망주가 많은 그해 동기생들 가운데서도 단연 전국 ‘최대어’로 꼽혔고, 고교 시절부터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져 화제를 모았다.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독보적인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200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해 성영훈을 잡은 두산은 1차 지명의 ‘승리자’였다. 문제는 지긋지긋한 ‘부상’이었다. 성영훈은 데뷔 첫해 9경기에 나와 2승 무패 평균자책점 3.38로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2010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공을 던지다 팔꿈치 인대가 파열됐다. 수술을 받고 곧바로 2년간 공익근무를 하면서 재활을 마쳤지만, 2013년부터는 어깨 통증이 찾아왔다. 결국 2015년 6월 일본에서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지독한 재활이 이어졌다. 2017년엔 잠시 꽃을 피울 가능성을 보였다. 5월 20일 마침내 1군 엔트리에 등록됐고, 곧바로 마운드에 올라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하지만 하늘은 그를 돕지 않았다. 이번엔 허리 통증이 찾아왔다. 설상가상으로 2군에서 공을 던지다 다시 팔꿈치를 다쳐 또 한 번 수술대에 올랐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성영훈과 함께 입단한 동기생 정수빈, 박건우, 허경민은 주전 선수로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성영훈은 여전히 아팠다. 두산도 결국 결단을 내렸다. ‘비운의 천재’ 성영훈은 그렇게 두산을 떠나게 됐다. 한화는 1차 지명 출신인 투수 성시헌(19)을 제외했다. 이 방출이 화제를 모은 것은 성시헌이 바로 ‘올해’ 입단한 1차지명 선수라서다. 수많은 1차 지명 선수가 프로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긴 했지만, 소속팀이 단 1년 만에 1차 지명 선수를 내보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가 있다. 천안 북일고 출신인 성시헌은 키 183cm, 체중 95kg로 체격 조건이 좋은 오른손 정통파 투수지만, 평균 구속이 시속 140km를 넘지 못해 ‘평범한 선수’로 분류됐다. 하지만 한화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차 지명 범위인 대전과 충남 지역 고교에서 지난해 좋은 유망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이징 키즈’들이 줄줄이 프로에 입단하고 서울 세 구단 1차 지명에선 치열한 손익계산이 펼쳐질 정도로 ‘신인 풍년’을 예고한 시즌이었지만, 한화에게만은 예외였다. 성시헌의 입단 계약금 1억 2000만 원은 올해 1차 지명 선수 10명 가운데 최소 금액이었고, 웬만한 구단 2차지명 상위 라운드 선수보다도 적었다. 한화는 1년간 육성군에서 성시헌을 신중하게 지켜본 끝에 내부적으로 ‘앞으로도 크게 성장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시헌은 결국 1군은 물론 퓨처스리그 등판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팀을 떠나게 됐다. 지역별 유망주 불균형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을 감수해야 했던 한화의 1차 지명 잔혹사도 그렇게 계속됐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