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한종진 바둑도장’ 출신 눈길…우리에겐 2년 전 김은지 있었는데…
한일 바둑계의 관심을 모은 열 살 소녀 나카무라 스미레. 일본 역사상 최연소 프로 입단자다.
2009년 3월 2일 태어난 스미레는 일본 내에서 사상 최연소 입단자다. 후지사와 슈코 9단 손녀 후지사와 리나가 보유한 기록 ‘11세 6개월’을 1년 반이나 앞당긴 기록이다. 한국은 조혜연 9단이 ‘11세 10개월’로 여자 최연소 입단 기록을 가지고 있다. 지난 12월 스미레와 시험기를 둔 장쉬 9단이 “어린 시절 이야마 유타보다 더 강하다”라고 말했다. 또 1월 초에 열린 이야마 유타와 스미레 기념대국을 보고 요다 노리모토 9단은 “100년 만에 나온 기재”라고 극찬해 일본 언론에 관심을 모았다. 스미레도 “박정환 9단, 이야마 유타 9단과 같은 세계적인 프로기사가 되고 싶다”라고 당찬 인터뷰를 하며 스타 탄생을 알렸다.
# 진짜 천재 vs 스타 마케팅
1월 22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나카무라 스미레 초단 기자회견장에는 50명이 넘는 취재진이 몰렸다. 구글이 주최한 알파고-이세돌 대결 기자회견 이후 이런 규모 기자단이 한국기원에 찾아온 기억은 없다. 취재진 대부분은 일본 측 언론이었다. NHK, 후지TV, 아사히TV 등 주요 방송사와 일간지에서 한국 특파원은 빠짐없이 한국기원에 집결했다. 한국 바둑TV가 준비한 이벤트 대국도 이어졌다. 23일 열린 한국 최정 9단과 일본 스미레 초단 대결도 적지 않은 셔터 세례를 받았다. 기자회견과 마찬가지로 이 대국 결과도 일본 주요 일간지를 장식했고, 메인 뉴스에서 방송했다. 덩달아 한국 매체도 ‘스미레 열풍’에 휩싸였다.
지난 12월 23일 스미레가 장쉬 9단과 둔 ‘영재추천 시험대국’은 빅으로 무승부가 났다. 올해 1월 6일 이야마 유타 9단과 가진 공개기념대국에선 결과를 내지 않고 중단했다. 일본 내에서 스미레 대국은 모두 정선에 역덤 6집을 받는 조건이었다. 최정 9단과 가진 기념대국은 각자 1시간을 주고 정선으로 대결해 180수 만에 스미레가 돌을 거뒀다.
최정 9단(왼쪽)과 스미레 초단의 대국 모습.
바둑TV 특별대국에서 보여준 스미레 실력은 기대치보다 아주 낮았다. 일각에선 ‘일본이 만든 스타 마케팅에 한국기원에 왜 나서나’, ‘실력이 더 센 한국 영재나 입단자를 띄워줘야 하지 않나’라는 비판부터 ‘최정 9단에게 석 점을 깔아야 할 치수인데 왜 정선으로 뒀나’는 비난까지 일었다. 가벼운 이벤트 대국이라고 생각했던 최정 9단도 언론이 과도한 관심을 보이자 많이 부담스러워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기원과 바둑TV도 애초 이런 규모로 기획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아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예상하지 못했다.
# 스미레=2년 전 김은지
한국 언론에서 스미레 입단을 최초 보도한 시기는 1월 6일 저녁이었다. 이후 각종 매체에서 한종진 도장에 취재요청을 했고, 한국기원 홍보팀까지 매일 전화가 이어졌다. 한종진 9단은 한국기원에 “스미레가 아직 어리다. 말도 잘 못 하고, 개별 취재를 부담스러워하니 하루 정도 날을 잡아 공동인터뷰를 하자”라고 제안했고 홍보팀은 22일로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이 소식이 알려지자 예상치 못하게 일본에서 문의가 폭주했고, 국내 매체도 가세했다. 한국기원 홍보팀 관계자는 “원래 작은 회의실에서 기자 몇 명에게 연락해 진행할 예정이었던 공동인터뷰가 생각지 못하게 대규모 기자회견으로 커졌다”라면서 “기자회견과 기념대국은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해명했다.
‘슈퍼매치 영재 정상대결’을 기획한 바둑TV 피디는 일요신문과 전화인터뷰에서 “기념 대국은 원래 설 특집 생방송을 기획했는데 최정 9단 스케줄이 안 맞아 녹화방송으로 변경했다. 기자회견 다음날로 대국 일정을 잡은 이유는 스미레가 바로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들어서였다. 시간과 치수 등 대국 조건은 주로 한종진 9단과 상의해 결정했다”라면서 “사실 이번 대국 내용은 조금 아쉬웠다. 최정 9단과 대국을 자극 삼아 앞으로 스미레가 더 강해지길 바란다. 이번 방송을 계기로 국내 영재나 입단자를 위한 방송도 자주 기획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를 채운 한일 취재진.
물론 ‘스미레 열풍’이 거품이 낀 일본식 스타마케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리고 귀여운 10살 천재 소녀 프로기사’란 소재는 국적을 불문하고 눈이 가는 뉴스거리다. 이런 면에서 ‘언론에서 띄워주는 일본이 부럽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한국도 2015년 SBS ‘영재발굴단’에 출연해 화제가 되었던 천재 바둑소녀 김은지 양이 있다. 김은지는 2007년 5월생인데 올해 1월 열린 여자입단대회까지 탈락해 4년째 수험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장수영 도장을 운영하는 박병규 9단은 “약 2년 전 스미레가 한국에서 전문도장을 물색할 때 우리 도장에도 방문했었고, 내가 지도기를 뒀다. 당시 스미레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우리 도장에서 있는 입단 유망주 김은지(12) 2학년 때 실력과 비슷했다. 이후 발전 속도도 김은지와 비슷했다. 스미레가 이번 바둑TV 대국에선 자기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아마도 스튜디오 대국이 처음이라 긴장한 듯하다. 스미레가 지닌 본 실력은 2년 전 김은지 수준이다”라는 감상을 전했다.
다른 바둑도장에서 10년째 지도사범으로 일한 모 프로기사는 “한국도 기재 넘치는 여자어린이들이 많다. 그러나 영재입단대회에선 또래 남자와 경쟁해야 하고, 여자입단대회는 이미 오래 공부한 언니들 틈을 뚫기가 쉽지 않다. 가끔 기재와 스타성이 넘치는 아이가 입단문턱에서 좌절해 바둑을 그만두는 걸 보면 ‘꼭 대회를 통해서 프로를 뽑는 게 최선인가’하는 의문이 든다. 대학입시도 ‘학종(학생부 종합전형)’이 주도하는 시대다. 바둑계도 전체를 보며 근본적인 제도 개선을 한번 생각해볼 시점이다. 좋은 명분이 있다면 우리도 일본처럼 특별입단제를 도입했으면 좋겠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박주성 객원기자
[기보1] 2018. 12. 13. 영재추천 시험기(정선, 역덤 6집) ● 나카무라 스미레 ○장쉬 9단 2년 동안 스미레를 지도한 한종진 9단은 “기풍은 처음 봤을 때부터 공격적이었다”라고 말한다. 장쉬 9단과 가진 시험대국이다. 초반은 무난했다. 우변에서 흑1부터 막아가며 흑7로 끊은 수도 매우 공격적인 수인데 여기선 수읽기 착각이 있었다. 만약 바로 흑A로 막으면 백은 B로 끊어간다. 흑C에는 백D로 돌려치는 수가 있었다. 백은 언제나 흑9 자리에 단수 치는 수가 있어 축이 안 되어도 흑이 더 나오기 어렵다. 흑은 어쩔 수 없이 중앙을 보강하고 백도 10을 두며 살았다. 스미레는 이 장면에서 공격해서 손해를 봤지만, 이후는 좋은 행마와 끝내기로 빅을 만들어 시험기에 합격했다. [기보2] 2019. 01. 06. 이야마유타배 신춘 기념대국(정선, 역덤 6집) ● 나카무라 스미레 ○이야마 유타 9단 동오사카시가 주최하는 어린이대회인 이야마유타배 신춘기념대국에 나온 스미레 초단. 이야마 유타와 마주 앉아 흑 1·3·5수로 변형 중국식 포석을 펼쳤다. 스미레는 이 포석을 23일 열린 최정 9단과 대국에도 그대로 썼다. 이야마 유타는 우상귀에서 사석작전을 펼치고, 우하귀에서도 현란한 행마를 보여준다. 스미레는 묵묵히 두어가며 흔들림이 없다. 초반 흑 43이 날일자가 기재를 엿볼 수 있는 한 수다. 이 대국은 행사 시간 때문에 170수까지 두고 이야마 유타가 대국을 중단했다. 승패를 가리지 않았지만, 중앙 접전에서 흑대마가 잡혀 백이 많이 유리한 형세였다. [기보3] 2019. 01. 23. 바둑TV 슈퍼매치 영재정상대결(정선) ● 나카무라 스미레 ○최정 9단 바둑TV에서 이 대국을 해설한 이희성 9단은 “처음부터 쭉 밀렸다. 우변 백2부터 14까지 우변에서 백이 안정하자 이미 선착의 효가 모두 사라졌다.” 두터운 수란 평가가 나왔던 흑13과 백14 교환에 대해서도 “더 공격하지 못하고 백을 그냥 굳혀준 수라 아쉽다”라고 말했다. 이후 16으로 들어간 백돌 공격에 실패하면서 형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너무 대책이 없었기에 흑15는 차라리 A 자리로 지키는 게 나았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국후 최정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두는 모습이 나를 닮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