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 선생님과의 일상적 장면에 대리만족…내가 가진 영향력의 무게 느낀다”
그런 정우성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작은 밥상’에 마주앉아 멸치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신다.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발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낯설지만 그만큼 신선한 정우성의 새로움을 엿볼 수 있는 무대는 2월 14일 개봉하는 영화 ‘증인’이다.
‘증인’은 여러모로 정우성에게 변화의 시작이 될 만한 작품이다. 정우성이 일찍이 보이지 않았던 일상적인 장면을 연기한 것도 그렇지만, 편견의 대상과 서서히 교감하고 소통하는 인물을 정감 어리게 그려낸 실력이 탁월하다. 영화가 담고 있는 따뜻한 소통의 메시지는 최근 정우성이 걷는 행보와도 맞닿아 있다.
2015년부터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이젠 국내서도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난민 문제와 관련해 꾸준히 목소리를 낸다. 인간애의 시선으로, 인류애적인 측면에서 난민을 바라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때론 그의 발언과 소신을 두고 악의적인 공격이 이뤄지기도 한다. 악성댓글이나 가짜뉴스의 희생양이 될 때도 많다. 그런데도 정우성은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증인’ 개봉을 앞두고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편견과 신념,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놨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정우성이 ‘증인’에서 맡은 역할은 한때 민변에 몸담았지만 지금은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다. 살인사건 용의자의 변호를 맡게 된 그는 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재판의 증인이 된 자폐 소녀(김향기 분)를 만나 교감하면서 진실에 한걸음씩 다가선다. 정우성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숨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고, 나도 모르게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배우로 살다보니 일상의 감정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드라마틱하지 않은, 일상적인 감정이 때로는 더욱 감동적이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번 영화는 일상의 얼굴로 나설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특히 아버지 역을 맡은 박근형 선생님과 보인 여러 장면들은 나에겐 대리만족과 같았다. 내가 겪지 못한 아버지와의 관계를 대신 경험해보는 듯했으니까 말이다.”
정우성은 어릴 때 독립해 혼자 생활한 탓에 아버지와 지낸 기억이 거의 없다고 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유년시절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종종 털어놓기도 하는 그는 “되게 무뚝뚝한 아들”이라고 자신을 평했다.
“아버지를 잘 모르고, 아버지도 나를 잘 모른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면도 있고,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약간 재미없는 남편이었던 것 같다. 요즘은 간혹 아버지와 내가 보낼 수 있는 둘만의 시간이 얼마나 될까, 상상한다. 아주 짧은 시간일 것 같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니까 아버지와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영화에서 박근형 선배님과 나눈 장면들이 나에겐 엄청난 순간일 수밖에 없었다.”
정우성은 영화에서 자폐 소녀의 증언의 진위를 알아내기 위해 어렵게 소통을 시작한다.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자폐 소녀를 향해 세상은 편견의 시선을 꺼내고, 정우성 역시 비슷하게 출발하지만 이내 눈을 맞추고 마음을 나눠가면서 벽을 허물어뜨린다. 편견과 소통의 키워드는 정우성의 삶에도 중요하다고 했다.
“소통이라는 건 자꾸만 나를 드러내기보다 상대방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시작되는 것 같다. 신념을 찾아가는 일도 비슷하고. 나를 만드는 건 결국 내 자신이 아니라, 내가 대하는 상대이지 않나. 아버지가 아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아이가 아버지를 만드는 것처럼.”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정우성은 배우로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따르는 사회적인 책임을 늘 생각한다고 했다. 의도하지 않아도 형성되는 영향력에 대한 무게도 인지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1997년 영화 ‘비트’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을 무렵을 꺼냈다. 당시 영화가 워낙 인기를 끌면서 극 중 여러 장면들도 화제가 된 상황에서 특히 그를 따라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까지 생겼다는 이야기다.
“‘비트’가 내게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인 동시에 ‘아, 영화라는 게 무섭구나’ 그런 생각도 일깨웠다. 어린 친구들이 ‘형 때문에 담배 피우고 싶다’는 말도 했으니까. 밀양에서 영화 ‘똥개’(2003년)를 찍을 때인데 촬영 끝나고 쉴 때 담배를 피우고 있었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학생들이 그런 나를 보고 있더라. ‘오! 멋있어’ 그러면서. 그 순간 내 손이 너무 민망했다. 담배를 어디에 감춰야 할지도 모르겠고. 배우라는 직업이 가진, 의도되지 않은 파급력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정우성은 오랫동안 주목받는 위치에서 살아오다 보니 때론 편견에도 시달렸다. 최근 난민 이슈와 관련해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배우를 떠나서 나는 편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것부터가 그렇지 않나.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지 않았으니까. 물론 사회가 바라는 요구라는 게 늘 정당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중간에 관두는 일도 정당하지 않다. 나는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깨우침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대상이 긍정적으로 나를 끌어준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정우성은 요즘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과 리영희 선생의 대담집인 ‘대화’를 읽고 있다. 얼마 전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았다가 임 소장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했다. 평소 관심을 둔 곳이라 일부러 시간을 내 찾았다는 정우성은 “책을 보면서 우리보다 앞선 세대에, 우리가 따라야 하고 궁금해 해야 할 좋은 선배님들이 많이 계셨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고 했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