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은퇴 후 정신병 앓는 사실 공개되자 영화촬영 내내 겪은 정신적 학대 ‘재조명’
셸리 듀발이라는 배우가 알려진 건 1977년 칸영화제였다. 로버트 앨트먼 감독의 ‘세 여인’에 출연한 듀발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그녀는 섬세하고 미묘한 감성을 표현하는 데 적역인 배우로 평가받았다. 스타덤에 오른 영화는 ‘뽀빠이’(1980)였다. 그녀는 뽀빠이 역을 맡은 로빈 윌리엄스보다 더 주목 받았다. 마른 몸에 커다란 눈의 듀발에 대해 “올리브 역을 위해 태어난 배우”라는 수식어까지 붙었다. 듀발 앞엔 탄탄대로가 놓여진 것처럼 보였다. 스탠리 큐브릭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큐브릭 감독과 셸리 듀발
1970년대 말, 큐브릭은 스티븐 킹의 소설 ‘샤이닝’을 각색하고 있었다. 콜로라도의 외딴 호텔에 벌어지는 이야기로, 미쳐가는 남편과 공포에 떠는 아내와 환상을 보는 아들이 주요 인물이었다. 큐브릭은 주인공 잭 역에 잭 니컬슨을 캐스팅 했다. 니컬슨은 아내 웬디 역에 당시 ‘킹콩’(1976)의 미녀 역으로 데뷔하며 한창 주가를 올리던 제시카 랭을 추천했다. 하지만 큐브릭의 생각은 달랐다. ‘세 여인’에서 셸리 듀발의 연기를 인상 깊게 봤기 때문이다. 듀발은 큐브릭의 섭외에 응했고, 세계적인 거장과 함께 한다는 생각에 가슴 설렜다.
현장은 그녀의 기대와 달랐다. 영화사상 최고의 완벽주의자로 평가되는 큐브릭은 이 영화가 요구하는 심리적 공포를 끌어내기 위해 배우들과 의도적으로 적대적 관계를 만들었다. 노련한 니컬슨은 감독과 싸우면서도 일종의 브로맨스를 형성했지만, 듀발은 달랐다. 감독은 그녀가 카메라 앞에서 진짜 공포심을 드러내길 원했다. 게다가 시나리오는 수시로 바뀌었고, 웬디의 대사는 갑자기 삭제되기 일쑤였다. 감독은 듀발을 극도로 소외시켰고, 때론 무시했으며 둘 사이에 논쟁은 잦아졌다.
결국 패자는 듀발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딸 비비언은 ‘샤이닝’ 현장에서 메이킹 필름을 찍었는데, 그녀의 증언에 의하면 큐브릭 감독은 스태프들에게 절대로 셸리 듀발에게 동정심을 지니거나 칭찬의 말을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감독은 듀발에게 “네가 현장에서 시간을 다 잡아먹고 있다”며 다그쳤다.
영화 ‘샤이닝’ 홍보 스틸 컷
듀발이 야구 배트를 들고 잭 니컬슨과 대결하는 장면은 정점이었다. 이 장면은 가장 많이 촬영한 장면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데, 총 127테이크를 갔다. 영화 속에서 배트를 들고 있는 듀발의 손이 덜덜 떨리고 눈이 붉게 충혈돼 있는 건 연기가 아니라 실제였다. 이 장면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로 탈모 현상을 겪은 듀발은 한 움큼의 빠진 머리카락을 큐브릭에게 선물이라며 주기도 했다.
“촬영이 있던 5월부터 10월까지 난 스트레스로 매우 건강이 안 좋았다. 큐브릭 감독은 나를 전례 없는 강도로 몰아쳤다. ‘샤이닝’의 웬디는 내가 맡았던 가장 힘든 역이었다.”
‘샤이닝’의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잭 니컬슨이 도끼로 문을 찍어 내리고 문 안에 있는 듀발이 공포에 떠는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3일 동안 60개의 문을 부수며 촬영했는데, 그 기간 내내 듀발은 좁은 공간에 갇혀 벌벌 떨어야 했고 진짜로 무서워 비명을 질렀다. 잭 니컬슨조차 “이 장면의 듀발은 배우가 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연기를 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촬영 막바지의 5~6주 동안은 카메라 앞에서 12시간 내내 눈물을 흘려야 했고, 결국은 탈수 증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듀발은 ‘프라이멀 스크림 요법’을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이 요법은 유아기의 트라우마를 눈물을 통해 치료하는 방법. 그녀는 지칠 때까지 운 후에 기력이 소진되고 멍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고 했다. 단지 영화 촬영이었을 뿐인데, 그녀는 마치 정신 치료를 받은 듯한 강한 감정적 경험을 했던 것이다.
영화 ‘샤이닝’ 홍보 스틸 컷
개봉 후 논란과 함께 영화 자체는 주목받았지만, ‘샤이닝’의 셸리 듀발은 영화 내내 비명을 질렀던 여배우로 기억될 뿐이었고, 이후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배우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2002년 53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했고, 그렇게 대중에게 잊혀갔다. 그랬던 듀발이 다시 관심을 끌게 된 건 2016년 어느 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60대 중반이 된 셸리 듀발이 텍사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은둔자처럼 살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이웃들의 증언에 의하면 듀발은 부스스한 외모로 동네를 넋이 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녀는 정신 상담 토크쇼인 ‘닥터 필’에 출연해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인이 된 듀발은 시종일관 횡설수설했다. ‘뽀빠이’에서 공연했던 로빈 윌리엄스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형상을 변형하며 계속 이 세상에 있다, 로빈 후드의 전설에 나오는 악당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회전하는 접시가 무릎에 박혀 있다 등등. 그녀는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샤이닝’ 현장에서 받았던 정신적 학대 이후 듀발의 내면이 무너졌다는 분석 기사들이 이어졌다.
과연 ‘샤이닝’은 셸리 듀발의 삶을 파괴한 것일까? 전적으로 그렇다고 볼 순 없지만, 그 현장에서 겪었던 1년은 듀발의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시간이었던 건 분명하다. 한편 현재 ‘미국 배우 펀드’가 그녀의 치료를 돕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