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 등 인맥 막강…‘코드 인사’ 논란 재점화
신임 관장으로 임명된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윤범모 관장은 민중미술계를 대표하는 평론가다. 1979년 임옥상, 오윤 작가 등과 함께 현실참여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을 창립한 멤버로 줄곧 한국 근대미술과 민중미술을 위해 힘써왔다. 민족미술협의회 산하 ‘그림마당 민’의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그가 쓴 한국 근대미술과 민중미술 책만 10권, 관련 글만 1000여 편에 이른다. 2014년 광주 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에서는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철거당하자 이에 항의하며 책임 큐레이터 자리를 내놓기도 했다.
이번 관장 공모는 처음부터 말이 많았다. 문체부에서 친정부적인 민중미술계 인사를 관장으로 올리고 싶어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바르토메우 마리 전임 관장이 적극적으로 연임의사를 밝혔음에도 문체부는 ‘한국적 정체성 확립’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를 두고 예술계에서 “차기 관장은 민중미술계 인사”라는 말이 나왔다. 새 신임 관장 공모는 지난 10월 있었다. 윤 관장을 포함해 총 13명이 응모했다. 민중미술계의 대부 격인 임옥상 작가도 1차 후보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단연 임옥상 작가였다. 허나 정부고위 관료 인사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정부는 임 작가를 최종 후보에 올리지 못했다. 1차 후보 명단이 나오자마자 예술계를 중심으로 ‘코드 인사’라는 비판이 빗발친 까닭이다. 2012년과 2017년 대선 때 연거푸 문재인 대통령 지지를 선언했던 임 작가는 자신의 작품 ‘광장에, 서’를 청와대에 거는 등 친정권 인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자연스레 또 다른 민중미술계 인사인 윤 관장에게로 시선이 집중됐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임 작가가 친구인 윤 관장을 추천했으며 문체부에서도 이를 수용해줬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임 절차부터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문체부가 민중미술계 인사를 선임하기 위해 선발 절차를 여러 차례 변경한 까닭이다. 실제로 문체부는 지난해 인사혁신처에 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에 고위공무원 역량평가를 면제해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고 역량평가를 실시했다.
평론가 A 씨는 “역량평가는 어학능력, 행정능력, 위기대처능력 등을 토대로 피평가자의 사고역량과 업무역량, 관계역량을 검증한다. 문체부가 은근슬쩍 역량평가를 건너뛰려 한 것을 두고 미술계에서는 ‘공공기관 행정직 경험이 없는 윤 관장을 위한 배려’라는 말이 많았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역량평가에서 발생했다. 윤 관장은 지난 12월 치러진 역량평가에서 기준 점수를 넘지 못했다. 최종후보였던 김홍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 등 3명 가운데 이용우 대표만 역량평가를 통과했다.
절차대로라면 역량평가를 통과한 이용우 대표가 인선절차를 밟았어야 했다. 그러나 문체부는 이용우 대표를 뽑는 대신 패자부활전을 실시했다. ‘장관 재량’이었다. 탈락자 2명은 지난달 중순 재시험을 치러 최종 후보의 지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관장직은 윤 관장에게 돌아갔다. 3급 이상의 고위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역량평가에서 탈락자에게 재평가 기회를 준 것은 고위공무원 역량평가제가 실시된 2006년 이래 처음이다.
주무부처인 문체부에서 대놓고 특정인을 밀어주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미술계에서 이렇다 할 반발의 움직임은 없다. 큐레이터 B 씨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미술계의 수장을 뽑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조용한 이유를 모르겠다. 블랙리스트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했다.
항간에선 가나아트센터 눈치 탓에 제대로 된 미술계의 쓴소리가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B 씨는 “안 그래도 좁은 미술계에서 큰 화랑의 눈 밖에 나면 밥그릇을 뺏기는 것은 시간문제다. 혹여나 국내 3대 화랑인 가나아트센터에 밉보일까 작가들이 눈치를 보고 있다”고 했다.
미술계가 가나아트센터 눈치를 보이는 이유는 미술계 내 가나아트센터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은 미술계의 큰손으로 불린다. 가나아트센터뿐만이 아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발간한 ‘2017미술시장실태조사’에 따르면 이 회장이 설립한 경매회사 서울옥션의 매출액이 전체 미술 경매 시장의 절반에 가깝다.
이호재 회장은 윤범모 관장, 임옥상 작가와 함께 민중미술계를 움직이는 중심축으로 알려졌다. 윤 관장과 임 작가는 이 회장이 설립한 가나문화재단의 이사이기도 하다. 윤범모 관장과 임옥상 작가는 현실참여 미술동인 ‘현실과발언’ 창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크고 작은 사업을 함께한 식구나 다름없는 사이로 알려졌다. 이들 셋의 영향력이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장 인사를 좌지우지했다는 반응이 미술계 이곳저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첫 평가의 유일한 합격자였던 이용우 대표는 2월 12일 입장을 발표했다. 그는 “이번 관장 임명 절차도 예상대로 상처투성이였다. 이번 인사가 소문이나 언론 보도대로 이미 내정된 인사라면 최종 후보자들은 물론 새로운 비전과 꿈을 갖고 공모에 응했던 미술계 내로라하는 10여 명의 응모자를 농락한 것”이라며 “나는 문화관광부 장관이나 문광부 직원조차 모른다. 어찌보면 들풀처럼 뜻만 무성한 채 공모제를 믿고 전쟁터에 나선 대책 없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이호재 회장의 입장을 대변한 서울옥션의 손지성 홍보팀장은 “이 회장은 윤 관장뿐만 아니라 여러 미술계 인사들과도 친한 사이다. 이런 소문이 도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서울옥션과 이 회장은 이번 선임절차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답했다.
이어 “윤 관장과 이 회장이 이사로 있는 가나문화재단은 상업적 목적 없이 순수하게 한국 미술을 전 세계에 알려 발전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윤 관장은 여론의 시선을 의식한 듯 2월 1일 임명장을 받자마자 포부부터 밝혔다. 그는 “역량평가에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절차상 문제는 없다”면서도 “국립현대미술관이 국민들에게 대중친화적이면서 이웃집 같은 미술관이 되도록 만들어가겠다. 특정 경향으로만 편협하게 전시하지 않고 미술사를 통섭할 수 있도록 두루 다양하게 기획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문체부는 특혜 논란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관계자 지난달 치른 재평가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장관 재량을 통해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며 정치적 결정은 없었다”고 답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