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 어려운 스타트업 안건은 보류…재무 빵빵한 대기업 안건은 통과
정부가 제2의 벤처 붐을 목표로 스타트업과 신기술을 지원하는 ‘규제 샌드박스’를 내놨지만,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6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관계부처 합동 브리핑을 갖고 ‘제2 벤처 붐 확산 전략’을 발표하는 모습. 왼쪽부터 민원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 최종구 금융위원장, 홍 부총리,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박원주 특허청장. 연합뉴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6일 관계부처 합동 브리핑에 참석해 ‘제2의 벤처붐 확산 전략’을 발표했다. 신사업과 고기술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이들에 대한 투자를 활성화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스타트업 친환경 인프라 구축을 위해 ‘규제 샌드박스’를 적극 추진해 연내 100건 이상의 활용 사례가 나오도록 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기재부에 따르면 지난 1월 17일 시행 이후 지난 6일까지 총 20건이 신청돼 17건이 통과됐다.
규제 샌드박스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가 담당하는 ‘ICT 규제 샌드박스’와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담당하는 ‘산업융합 규제 샌드박스’가 있다. 규제 샌드박스 지정 안건에는 검증 기간 동안 제한된 구역에서 일정 기간 규제를 면해주는 ‘실증특례’와 임시로 시장 출시를 허용하는 ‘임시허가’가 포함된다.
산업부는 지난 2월 11일 제1차 산업융합 규제특례심의위원회를 열고 도심 수소전기차 충전소 등 4건을 규제 샌드박스 사례로 지정했으며, 이후 2차 심의를 통해 총 9건의 기업 애로사항을 해결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산업부가 총 9건을 심의위원회에 올렸고 실증특례, 임시허가 등을 8건 지정했으며 나머지 1건은 법령 해석과 관계부처 협의를 통해 사업이 가능한 것을 확인해준 것”이라고 전했다.
과기부도 지난 2월 14일 1차 심의위원회를 열고 카카오페이와 KT가 신청한 ‘행정·공공기관 고지서 모바일 서비스’ 등 3건을 지정했으며, 이후 2차 심의에서도 5건의 상정 안건 가운데 4건을 지정했다. 심의에서 지정되지 못한 디지털 배달통을 활용한 오토바이 광고서비스는 보류 결정돼 3차 심의위원회에 재상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토바이 광고서비스 실증특례를 신청했던 장민우 뉴코애드윈드 대표가 심의에 반발하며 심사포기를 선언했다.
장민우 대표는 “정부가 제2의 벤처 붐을 일으키겠다며 신사업의 성장을 돕겠다는 취지로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시행했지만, 공무원들의 안일한 태도로 오히려 스타트업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생겼다”며 “탁상행정으로 무조건 반대를 내세우는 관계부처에 실망해 퇴장했지만, 심의위원회는 한마디 상의 없이 ‘보류’라며 내달 재상정하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장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행정안전부는 당초 실증특례 조건으로 10대를 제작해 운영할 것을 제안했으며, 장 대표가 사업성을 이유로 반대하자 100대로 시범운영 개수를 늘렸다. 장 대표는 “생산라인에 50억 원을 투입해야 하는데, 당초 제안대로 10대를 만들면 한 대당 5억이 들고, 100대로 늘린다 해도 한 대당 5000만 원이 든다”며 “관계부처 공무원들이 사업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니 위원회에 참석했던 민간위원도 ‘차라리 다른 나라에서 사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고 지적했다.
이미 중국, 유럽 등에서 상용화된 배달통 LED 광고를 국내서는 법으로 규제하고 있으나 실상 다수 업체가 배달통을 LED 광고를 하고 있어 법이 사문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체들은 규제 샌드박스를 통과해 합법적으로 운영하려 했던 것인데, 이마저도 어려워졌다. 장 대표와 민간 전문가가 관계부처를 설득하려 했지만 ‘안정성’을 지적하고 나선 일부 부처의 반대가 거셌다. 장 대표는 “심의위원회에서 규제 샌드박스로 지정되지 못한 것이 알려지자 투자금을 대출한 은행에서 연락이 오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실증특례를 허가받은 다른 업체도 생산라인에 투자되는 금액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제품을 시범운영하게 돼 걱정이 많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사업성 이외에도 재무자료와 신용평가자료 등을 요구해 재무상황이 어려운 스타트업에 실효성이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신기술을 보유하고 있을지라도 서비스가 시장에 출시되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리는 스타트업의 경우 초기 투자를 받기 어려워 재무상태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규제 샌드박스 심의 과정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아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
한 IT 스타트업 대표는 “대기업의 경우 재무상태도 양호한 데다 신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규제 샌드박스 적용 대상으로 지정되기 쉽지만, 소규모 스타트업 중엔 재무상태가 불안정한 곳이 다수”라며 “규제 샌드박스가 취지와 달리 혁신기업이 아닌 대기업의 이해관계에 손을 들어주는 창구가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전했다. 현대차, 카카오페이, KT 등 대기업의 신청 건이 ‘1호 사업’으로 지정되며 무난히 통과한 데 반해 스타트업의 신청 안건은 보류되거나 심의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과기부 관계자는 “법으로 막혀 있던 부분에 대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테스트 기회를 주자는 것이 제도의 취지”라며 “필수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자료만 요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스타트업의 의견을 수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