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삼성전자 상무보로 발령받으면서 경영권 승계에 본격 시동을 걸었던 삼성 이재용 상무보(오른쪽서 두번째) 의 올 정기인사 승진계획이 정치상황과 맞물려 어떻게 될 지 주목된다. | ||
당초 삼성은 올해 인사에서 이 상무보를 부사장급으로 승진시켜 차기 경영권 이양작업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계획은 노무현 정권 출범을 앞둔 정치상황 변화의 암초를 만나 무산될 우려를 낳고 있다.
오는 2월 대통령 취임을 앞둔 노무현 당선자가 진행중인 재벌개혁의 중심어가 ‘오너체제 개혁’으로 모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자동차 등 일부 2세 체제이양을 준비해온 다른 재벌들이 서둘러 2세들을 승진시키면서 ‘족벌경영’ 등의 논란을 불러일으켜 삼성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이에 앞서 이재용 상무보가 직접 연관된 ‘증여세 포괄주의’ 등 사실상 재벌을 겨냥한 개혁적 프로그램이 제시된 부분도 삼성의 입장을 곤경에 빠트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삼성의 현 상황이 가능한 한 빨리 이 상무보를 최고 경영자의 위치에 근접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지난 2000년 이후 위기관리 경영에 들어간 삼성으로선 경영권 안정이라는 측면에서도 이재용 체제의 기반을 확고히 다져두어야 하는 상황이다. 어쨌든 삼성은 이 상무보의 인사문제와 관련해 무리를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인지 양단간 결론을 내려야 한다.
정기 임원 인사를 불과 한달반 정도 남겨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룹 정기 임원인사 시기는 2월말 혹은 3월초로 예정돼 있다. 삼성전자의 주총이 3월 초순으로 잡혀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재용 상무보에 대한 인사문제를 결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의 전략은 일단 노무현 정권이 공식 출범한 이후 상황변화를 보자는 생각인 듯하다. 그룹 관계자도 “아직 인사의 방향이 정해진 것이 없다”며 분명한 얘기는 삼가고 있다. 삼성의 또다른 고위 관계자는 “이 상무보의 인사 문제는 그룹 내부문제일 뿐이며, 재벌개혁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며 지나친 확대해석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삼성그룹 관계자들의 주장에는 “상황에 따라 방향을 정하겠다”는 뜻이 저변에 깔려 있는 듯하다. 그동안 삼성은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저돌적’ 돌파보다는 ‘온건적’ 방법으로 장애물을 넘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우회로를 택하는 것보다는 부닥쳐 보아야 한다는 정면돌파의 의지가 엿보이긴 한다.
정면돌파를 할 것이라는 전망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이 상무보를 삼성전자 상무보로 발령을 내면서 가장 큰 문제였던 그룹경영진에 합류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경영진입이 어렵지, 일단 진입에 성공한 이상 자체 승진은 별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같은 삼성의 주장에 대해 이제 와서 문제 삼기는 어렵다. 게다가 삼성이 굳이 이 상무보를 승진시키고자 한다면 막을 수도 없다. 기업 내부의 승진문제는 이사회와 주총에서만 문제를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상무보의 승진을 정치권에서 문제 삼는다면 그것은 재벌개혁이라는 점보다는 정권의 기업경영 개입이라는 또다른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다만 문제를 삼는다면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은 비상장 계열사의 신주인수권부 사채 발행, 전환사채 매입 등이다. 재산증여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깔끔하게 뒷마무리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해 삼성내 일부에서는 이 상무보를 부사장급으로 승진시킨 뒤 미국이나 일본의 삼성전자 현지법인으로 일단 내보내는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그룹핵심 경영진에서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경영진에 합류한 뒤 1년 만에 승진하고, 해외로 나간다면 여론 피하기라는 또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삼성 안팎에서는 이번 정기 임원인사에서 이 상무보를 부사장급으로 승진시킨 뒤, 그룹구조조정본부로 이동시키는 방안이 강력히 추진되고 있다는 말도 있다.
이는 삼성이 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초강수의 하나이다. 만약 이 상무보가 승진 후 구조본에 합류한다면 그것은 곧 이 상무보의 경영체제가 빠르게 구축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이 이 길을 택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이 상무보의 행보와 관련해 삼성이 보여주었던 온건적인 태도에서 강경한 방향으로 계속 밀고 나갈 것임을 예고하는 전주곡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가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현 상황에서 삼성이 굳이 그렇게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의 건강이나, 이 상무보의 그룹지배권이 어느 정도 확보된 상황에서 정권이나 여론과 정면충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삼성의 입장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상무보를 승진시킬 경우 불거질 가능성이 있는 불리한 여론 부분이 아니다. 문제는 노무현 당선자 캠프에서 추진중인 ‘재벌그룹 금융계열사의 경영분리 청구제’다. 이 제도는 재벌그룹 산하 금융계열사를 그룹경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제도가 시행될 경우 삼성은 치명타를 입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삼성의 경우 이건희 회장 가계가 경영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근간이 삼성생명, 삼성증권, 삼성카드 등 금융 계열사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생명의 경우 전자, 물산, 에버랜드 등의 지분을 교차보유하고 있는 핵심 매개역할을 하고 있다.
에버랜드를 정점으로 한 그룹소유 구조를 전면 개편하는 작업이 거의 마무리된 단계이지만, 완전한 지배력을 갖기 위해서는 삼성생명-에버랜드를 연결하는 고리를 장악해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이 이 상무보의 승진 문제에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면에는 이같은 점도 일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삼성은 한편으론 “굳이 이번에 승진할 필요가 있느냐”는 온건론도 펴고 있다. 그동안 소유권 이양 문제가 거의 매듭지어진 단계에서 어차피 이 상무보의 그룹내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이 된 만큼 새삼 인사 잡음을 일으켜 여론과 정치권의 표적이 될 필요가 없다는 현실론이 그것이다.
그룹내 일부에서는 이 상무보의 승진을 보류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재벌개혁의 태풍이 다시 몰아친 가운데 이 상무보의 승진 문제로 난관에 봉착한 삼성이, 현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묘수를 내놓을지 정•재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