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린다 게이츠 회고록 출간…가사노동 성평등 문제·개발도상국 빈곤 문제도 언급
빌 게이츠의 아내인 멜린다 게이츠가 한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담담히 기술한 회고록 ‘상승의 순간’을 출간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AP/연합뉴스
멜린다가 처음 게이츠를 만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였다. 당시 게이츠는 회사 CEO였고, 멜린다는 듀크대 컴퓨터공학과 및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했다. 아직은 작은 회사였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멜린다는 여직원으로서는 유일하게 MBA를 취득한 사원이었으며, 마케팅 매니저로 입사해 다양한 멀티미디어 제품을 개발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 지사로 출장을 갔던 멜린다는 그곳에서 동료로부터 회사 행사차 열리는 저녁 만찬에 참석할 것을 제안 받았다. 멜린다는 책에서 “나는 행사 시간에 늦게 도착했다. 빈 자리 두 개가 나란히 있는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리가 차있었다. 몇 분 후 빌이 도착해서는 내 옆의 자리에 앉았다”라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고, 멜린다는 게이츠와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소개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그가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후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회사 주차장에서 다시 빌과 마주쳤다. 그가 말을 걸더니 이번 금요일로부터 2주 후에 데이트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자연스럽지 않은데요? 좀 더 가까운 날짜에 신청하세요’라고 말하고는 내 전화번호를 건넸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시간 후에 게이츠는 멜린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서는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리고는 “이 정도면 충분히 자연스럽죠?”라고 물었다. 이렇게 데이트를 시작한 멜린다와 게이츠는 금세 가까워졌다. 멜린다는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퍼즐 맞추기를 좋아했고, 경쟁도 좋아했다. 그래서 퍼즐 대회에도 참가하고 수학 게임도 했다”고 말하면서 “내 생각에 빌은 내가 수학 게임에서 이기고, 처음으로 ‘클루’ 게임에서 이겼을 때 나한테 강한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멜린다는 또한 “어쩌면 그때 빌은 자신의 반쪽을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약혼했을 때 누군가 빌에게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멜린다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그러자 빌이 대답했다. ‘놀랍게도 멜린다는 내가 결혼을 하고 싶게 만들어’”라고 말했다.
똑똑하고 유능한 직원이었던 멜린다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거침없이 승진했다. 1000명이 넘는 팀원을 거느린 팀장까지 올랐으며, 1990년 초에는 정보제품의 총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리고 1994년 하와이에서 게이츠와 결혼식을 올린 후에도 한동안 멜린다는 회사에서 중요 업무를 담당하면서 일을 계속해 나갔다.
빌 게이츠 부부는 마이크로소프트 CEO와 직원으로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결혼 후 2년 정도가 지났을 때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첫째를 임신한 것이었다. 멜린다는 책에서 “결혼한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갈 무렵인 1995년, 빌과 나는 중국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나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라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멜린다는 게이츠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지를 두고 고민했다. 좀처럼 휴가를 가지 못하고 있던 남편을 위한 배려이자, 함께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었던 친구들 때문이었다. 멜린다는 “나는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올 때까지 빌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난 후에 바뀌었다. 멜린다는 책에서 “아냐. 빌에게 알려야 해.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무엇보다도 빌의 아이이기도 하니까”라고 말하면서 임신 사실을 게이츠에게 알렸다고 말했다. 게이츠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임신 소식에 흥분했던 게이츠는 “나한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장난해?”라면서 서운해하기도 했다.
중국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멜린다는 또 한 번 게이츠를 놀라게 했다. 멜린다는 “아이를 낳은 후에는 일을 그만둘 거야. 다시 복직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고, 아내의 이런 결정에 충격을 받았던 게이츠는 “안 돌아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물었다.
아내가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전업주부로 남기로 했다는 결정에 게이츠는 상당히 놀라워했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데다 일하기를 좋아했던 아내가 그런 결정을 내리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며 충격을 받은 게이츠에게 멜린다는 “우리는 다행히 내가 돈을 벌지 않아도 되잖아.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가정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야. 당신은 회사 일을 줄이지 않을 것이고, 나는 회사일을 잘 해내면서 동시에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시간을 어떻게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멜린다는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 대해 자라온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멜린다는 ‘비즈니스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전업주부인 텍사스주 댈러스의 중산층 동네에서 자랐다. 내 어머니는 소규모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역시 대부분의 시간은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보내셨다. 작은 사업을 하는 워킹맘으로서의 롤모델은 있었지만, 직장에 나가는 워킹맘으로서의 롤모델은 없었다”고 말했다.
회고록에서도 멜린다는 “당시 내 개인적인 이상형은-별로 의식이 있는 이상형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남자는 밖에서 일을 하고 여자는 집에 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전제는 두었다. “솔직히 여성들 스스로 집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의 문제여야 한다. 다른 여지가 없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게이츠는 이런 아내를 이해해주는 한편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다. 멜린다는 “빌은 놀라울 정도로 모든 면에서 힘껏 도와주었다”고 말했다. 육아와 가사일에 지칠 때면 멜린다는 게이츠에게 ’도와줘!’라고 외쳤고, 이런 아내를 게이츠는 성심껏 도와주었다. 일례로 2001년 가을, 첫째 딸이 유치원에 등원하기 시작했을 때 멜린다는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유치원으로 매일 왕복운전을 해야 했다. 이에 대해 불평하자 게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할게. 그러면서 딸이랑 대화할 시간도 갖고 말이지.” 그렇게 해서 게이츠는 일주일에 이틀씩 손수 운전을 하고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3주 후, 유치원에 갔던 멜린다는 생소한 풍경을 보게 됐다. 유치원에 자녀들을 데리고 온 아빠들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이에 멜린다는 엄마들 가운데 한 명에게 “어떻게 된 거야? 아빠들이 많이 오셨네”라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놀라웠다. “모두들 빌이 운전하고 오는 것을 보고는 집으로 가서 남편에게 말했지. ‘빌 게이츠도 애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있어. 그러니까 당신도 할 수 있어’라고 말이야.”
멜린다 게이츠는 회고록에서 가사노동의 성 불균형 문제와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멜린다는 모든 걸 갖춘 사모님이 부리는 투정이라고 비난하는 시선에 대해서도 조심스런 입장을 보였다. 멜린다는 가사노동의 성비 불균형은 많은 여성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된 문제라고 말하면서 궁극적으로 무급으로 일하는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에 숨겨져 있는 주제는 ‘관계의 평등’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 멜린다는 남편과 함께 세운 재단에서 하고 있는 역할과 임무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무엇보다 여성 해방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멜린다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을 여행하면서 만난 여성들은 모두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무급으로 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무급으로 하는 일에 대해 멜린다는 “육아나 다른 부양의 역할, 요리, 청소, 장보기, 그리고 심부름과 같은 집안일들”이라고 말했다.
실제 평균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시간을 가사일에 소비하고 있으며, 그 격차가 0인 나라는 이 세상에 아무 데도 없다고 멜린다는 말했다. 그러면서 이는 여성이 평생 동안 남성보다 평균 7년 이상 가사일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말했다.
현재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개발도상국에서 빈곤을 줄이고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후원하고 있으며, 백신 개발 및 피임약 보급을 비롯한 가족계획 문제 등 빈곤국의 여성들을 위한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멜린다는 “처음부터 우리는 정부와 시장이 다루지 않는 문제나 그들이 시도하지 않는 해법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적은 투자로도 엄청난 개선을 일으킬 수 있지만 간과되고 있던 아이디어를 발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멜린다는 “가난은 힘없는 여성들과 손을 잡는다. 가난을 찾아 다니다 보면 힘없는 여성들을 발견하게 되고, 번영을 찾아 다니다 보면 힘을 갖고 그것을 이용하고 있는 여성들을 보게 된다”라고 말했다.
한편 멜린다는 결혼과 출산 후에 한때 자아를 상실해서 고통스러웠다고도 말했다. CEO였던 남편은 너무 바빴으며, 멜린다는 지독히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은 원치 않았지만 게이츠가 총각 때부터 짓고 있었던 대저택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더욱 더 우울해졌다고 말했다. 멜린다는 “나는 딱히 그 집으로 이사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빌과 나는 원하는 바가 같은 것 같지도 않았고, 그것에 대해 논의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당시 자의식을 상실했던 멜린다는 책에서 “나는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고 말했다. 또한 “나는 더 이상 컴퓨터회사 경영자가 아니었다. 나는 어린 자녀들을 둔 엄마였고, 출장을 많이 다니는 바쁜 남편이 있었으며, 막 대저택으로 이사를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라고도 말했다.
세 자녀가 모두 성장하자 전업주부에 대한 멜린다의 관점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멜린다는 “나중에야 나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다시 일하는 엄마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멜린다는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현재 멜린다는 주부이면서 동시에 마이크로소프트 경영진과 자선사업가 등 세 가지 일을 겸하고 있다. 멜린다는 “나는 현재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54세인 지금의 내가 매우 편안하게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