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 데뷔 11년 차에 기량 꽃피운 장민재... ‘부상-개명-군복무’ 우여곡절 끝 한화 토종 에이스로 거듭난 사연
한화 이글스 토종 에이스 장민재. 사진=한
[일요신문] 한화 이글스 장민재(29)의 2019시즌 성적은 화려한 편이다. 지난 4월 선발로 마운드에 오른 그는 14일 현재 12경기에서 6승 3패 평균자책점 4.02를 기록했고 모든 경기에서 5이닝 이상 호투를 펼쳤다. 포크볼을 주무기로 활용하면서 130km대의 느린 공을 원하는 곳에 제구하며 타이밍을 빼앗는 투구가 일품이다.
데뷔 11년 차를 맞이한 장민재의 야구 인생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광주일고 출신으로 2009년 2차 3번 전체 22순위로 한화에 입단했지만 팔꿈치 수술과 부진 등이 이어지면서 1군과 2군, 선발과 불펜을 넘나드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4년 전부터 한화 시절 룸메이트 선후배의 인연을 이어갔던 류현진과 일본 오키나와에서 개인 훈련을 하며 야구에 새롭게 눈을 뜬 그는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올 시즌 야구장으로 향하는 길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12일, 한화이글스파크에서 장민재를 만났다.
장민재는 한용덕 감독과 인연이 깊다. 프로 데뷔 후 2군에서 훈련할 당시 2군 투수 코치가 한용덕 감독이었다. 한 감독의 지도를 받고 2군 경기에 처음 등판한 날, 장민재는 지옥과 천당을 오간 경험을 들려줬다.
“프로 데뷔 후 2군 첫 선발 등판 경기가 삼성전이었다. 그런데 1회 2아웃이 되기 전에 8실점하고 강판당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3아웃으로 이닝 종료도 못한 채 강판을 당하니 정신이 혼미해지더라. 2군에서도 이렇게 당하는데 1군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싶었다. 경기 후 감독님께서 외야까지 ‘악’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오라고 하신 뒤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처음부터 잘하는 선수는 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진정한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2군 데뷔전이 너무 뼈아팠지만 당시 코치님이셨던 감독님의 조언은 오랫동안 나를 다잡아준 계기가 됐다. 덕분에 잠을 잘 때도 야구공을 손에 쥐고 잘 정도로 야구를 잘하고 싶은 욕심을 키울 수 있었다.”
장민재는 2010년 8월, 1군에 합류했고 불펜 투수로 활약하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 1군 데뷔 후 처음으로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상대팀은 SK와이번스였고, SK의 선발투수는 김광현이었다.
“그 경기가 나름 중요한 경기였다. (류)현진이 형과 (김)광현이 형이 그해 탈삼진 1,2위를 다툴 때라 경기 내용에 관심이 모아졌던 상황이었다. 데뷔 첫 선발 등판에서 나는 5이닝 1실점하고 내려왔고, 한화 타선이 터지면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이끌며 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 당시 현진이 형이 선수들에게 탈삼진 1위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며 수십 마리의 치킨을 돌리기도 했다(2010년 류현진-다승 2위 탈삼진 1위 방어율 1위 승률 1위, 김광현-다승 1위 탈삼진 2위 방어율 2위 승률 2위).”
이듬해인 2011년의 활약을 떠올리던 장민재는 “철부지처럼 1군 선수로 등록된 부분에 만족하고 안주한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한대화 감독님께서 시즌 초 1군으로 부르셨는데 처음으로 오랫동안 1군 생활을 지속하면서 그 맛과 멋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 스물 두 살의 어린 나이라 상황 판단 능력이 흐렸던 것 같다. 감독님께서 꾸준히 선발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에도 결과는 36경기에 나서 1승 7패가 전부였다(평균자책점 6.06). 어떤 설명도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처참한 성적표였다. 결국 이듬해 6월 오른쪽 팔꿈치 신경 수술을 받았고, 8월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 시작했다.”
2012년 장민재는 1군에서 단 한 개의 공도 던지지 못하고 시즌을 접은 후 팔꿈치 수술과 군 문제를 해결했고 2014년 10월 소집 해제된 후 이름을 장‘민제(民濟)’에서 ‘민재(玟宰)’로 개명하며 변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별다른 개명 효과를 보지 못했다. 2015년 복귀했지만 3년의 공백기로 실전 감각을 회복하는데 어려움을 겪은데다 14kg을 감량한 탓인지 구위마저 하락했다. 1과 2군을 오락가락했고 1군에 있을 때는 배팅볼 투수로 마운드에 오를 때도 있었다.
한화 선발투수 장민재. 사진=이영미 기
“당시 김성근 감독님께서 배팅볼을 던지며 구위를 회복하라고 배팅볼 투수로 내보내셨지만 내 입장에서는 자괴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김)민우가 신인 선수로 입단했는데 그런 후배들에게 배팅볼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굉장히 창피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내가 이러려고 야구를 했나’ 싶더라.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이 내게 엄청난 자극제가 됐다. 그런 경험을 하지 않고 2군에만 머물렀다면 허송세월로 보냈을 것이다. 몸은 1군에 있어도 경기에 나가지 못한 채 배팅볼을 던지며 선수단과 동행하는 경험은 어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경험 아닌가. 그 무렵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싶더라.”
한때는 야구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구장 울타리를 벗어난 생활은 더욱 자신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야구만 해온 인생이라 야구를 떠난 삶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고.
“야구 팬들에게 ‘장민재’라는 이름은 알리고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온전히 내 성공만을 위해 헌신해온 부모님을 위해서도 일어나야만 했다. 그때 내게 도움을 준 이가 현진이 형이다.”
장민재는 프로 데뷔 후 류현진과 룸메이트로 인연을 맺었다. 류현진은 이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민재를 처음 봤을 때 선배인 줄 알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가 나중에서야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리다는 걸 알았다”며 웃음을 터트린 적이 있었다. 선후배들을 잘 챙기기로 소문난 류현진은 프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장민재를 살뜰히 챙겼다. 이후 류현진은 LA 다저스에 입단했고 2015년부터 장민재와 함께 비시즌 때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개인 훈련을 가졌다.
“현진이 형이 2015년 어깨 수술을 받고 그 해 비시즌 때부터 해마다 일본으로 개인 훈련을 떠났다. 처음에는 나와 현진이 형하고만 갔다가 지난 겨울에는 이태양, (윤)석민이 형, 김용일 코치님(류현진 전담 트레이너)이 동행하면서 좀 더 체계적으로 훈련할 수 있었다. 김 코치님이 훈련 관련해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형들하고만 있을 때보다 코치님의 관리를 받으며 훈련하니까 굉장히 효율적이었고,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훈련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현진이 형이 훈련하는 모습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밖에서는 장난도 많이 치고 심한 농담도 주고받는 친한 형이지만 훈련할 때만큼은 굉장히 진지했다. 다저스의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눈치껏 따라 하면서 내 몸에 맞는 방법으로 변환시킨 부분도 있었다. 올 시즌 현진이 형이 최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도 현진이 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열심히 하는 중이다. 서로 자주 연락하면서 응원을 주고받는 재미가 크다.”
장민재는 올 시즌 한화 개막 선발진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4월 초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고, 4월 2일 대전 LG전에 선발 등판해 5이닝 4피안타 4볼넷 6탈삼진 2실점(1자책)을 기록하며 시즌 첫 선발등판에서 첫 승리를 수확했다.
5월 28일 대전 KIA전은 장민재가 ‘인생투’를 펼친 경기였다. 장민재는 이날 8이닝 동안 삼진 9개를 잡아내며 단 1점도 내주지 않았다. 팀이 어려운 시기에 최고의 피칭을 보여주면서 8이닝 3피안타 1볼넷 9탈삼진 무실점 호투로 한화의 2대0 승리를 이끌었고 시즌 6승을 챙겼다. 데뷔 11년 만에 가장 길게 던진 이닝이었고, 삼진 역시 개인 최다였다.
“그날 경기 마치고 중계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는데 마침 해설위원이 정민철 위원님이었다. 한화에서 같이 야구했던 선배가 내게 소감이 어떠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프로에서 11년 동안 야구했는데 임팩트있었던 시즌이 없었다. 올시즌에는 임팩트 있는 시즌을 보내고 싶다. 그리고 데뷔 후 처음으로 10승에 도전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장민재의 올 시즌 연봉은 9000만 원. 올 시즌을 잘 마무리 짓는다면 내년 시즌 억대 연봉 대열에 올라서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는 억대 연봉을 받게 된다면 부모님 명의의 집을 장만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류현진 이후 한화에서는 토종 에이스의 부재에 시달렸다. 과연 장민재가 그 끈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