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검증 생략·보도자료 수정 등 검경 모두 조심…범조계 “새로운 기준 만들 기회”
# 울산에서 시작된 피의사실 공표 갈등
울산에서 검찰과 경찰의 갈등은 약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6년 경찰이 불법 포경 증거물로 압수한 고래 고기 가운데 상당량을 울산지검이 사건 발생 약 한 달 만에 피의자들에게 돌려주자 2017년 4월, 부실 수사라며 담당 검사 등에 대한 수사를 벌였다. 그러자 울산지검은 지난 5월 말, 울산지방경찰청 수사 계장급 1명과 팀장급 1명에 대해 약사 면허증 위조 사건에 대한 보도자료가 피의사실 공표 위반 소지가 있다며 수사에 착수했다.
갑작스레 울산지검이 ‘피의사실 공표 처벌’ 카드를 꺼내들면서 검찰과 경찰 내에서는 “잘못 언론에 얘기했다가는 몇 년 후에는 어떻게든 처벌받을 수 있다”는 우려감이 확산됐다. 그리고 국민적 공분을 받고 있는 고유정 사건에서 검찰과 경찰이 한편이 됐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는 굵직한 이슈 앞에서도 “조심해야 한다”는 중론이 더 앞섰다.
실제 제주지검은 고유정 사건 중간 브리핑에 앞서 기자들에게 배포하는 보도자료를 긴급 수정했다.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할 만한 민감한 내용이 들어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는데, 검찰은 “추가로 확인된 증거가 있지만 공소유지 과정에서 공개하기 위해”라고 설명했다. 지나치게 ‘구체적인 증거’를 공개했다가 피의사실 공표로 처벌받을 가능성을 감안한 조심스런 행보였다.
장기석 제주지검 차장검사가 제주지검 중회의실에서 ‘제주 전 남편 살해 사건’ 피의자 고유정 기소와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식 브리핑도 조심스레 진행됐다. 제주지방검찰청은 대검찰청과 조율된 공식 브리핑에서도 고유정을 살인 및 사체손괴 은닉 혐의로 구속기소한다는 기본적인 내용만 반복했을 뿐, 구체적인 ‘범행 과정’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고유정 씨가 살인을 위해 졸피뎀을 사용하고 관련 증거를 치밀하게 인멸하는 등 여러 면에서 계획적이고 악의적인 범행이었다는 것이 속속 드러났지만, 구체적인 진행 사안에 대해서는 “피의사실 공표 가능성”이라는 이유로 말을 아꼈다. 제주지검 수사팀 공보 담당 검사는 “피의사실 공표를 우려한 검찰이 지나치게 언론을 통제해서 쓸 기사 없다고 써 달라”는 농담도 던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달라는 취지였다는 게 후문이다.
# 얼굴까지 공개해 놓고 피의자 인권?
경찰도 똑같았다.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기 이전까지 같은 이유로 고유정 수사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특히 경찰은 ‘피의자 인권’을 이유로 고유정에 대해 배려하는 듯 태도를 취했다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처음 사건을 맡은 제주 동부경찰서 박기남 서장은 통상 살인 사건 때 이뤄지는 현장검증을 하지 않았다. “야만적인 현대판 조리돌림이 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경찰이 고 씨 현장 검증을 포기한 배경으로 “고 씨가 범행 동기를 허위진술로 일관하고 있어서 현장 검증을 해도 입증의 의미가 없다”도 덧붙이며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하지만 민심은 달랐다. 실명 공개 등 신상 정보 공개가 결정된 사건인 만큼 국민적인 비판이 쇄도했다. 제주 동부경찰서 홈페이지 ‘칭찬한마디’ 게시판에는 박 서장은 물론, 현장검증을 하지 않기로 한 제주 경찰을 질타하는 글들이 도배됐다. 특정 글에서는 “고유정 집안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러냐”며 제주 경찰이 고 씨를 비호한다는 확인 안 된 주장도 제기되면서 경찰을 당혹케 했다.
그러나 검찰은 제주 경찰을 옹호했다. “현장검증을 하지 않은 경찰이 옳았다”는 취지의 의견을 내놓은 것. 사실상 제주 지역에서만큼은 검찰과 경찰이 서로 공동 운명체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대목이다.
# 법조계 “새로운 기준 만들 좋은 시점이지만…”
그렇다면 법조계 의견은 어떨까. 경찰이 현장검증을 하지 않고 피의자 인권을 중시한 것과,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 신중해지는 것에 대해 법조인마다 각각 찬반으로 의견이 나뉜다. 하지만 그들 모두 ‘새로운 기준을 만들 때’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중간간부를 역임한 검찰 출신의 변호사는 “검찰과 변호사를 모두 해보니, 수사 기관 입장에서는 보도 자료 등을 통해 언론에 사실관계를 흘리면 다툼의 여지가 있는 심증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미리 사실 관계를 확정해 여론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변호사 입장에서는 거짓된 내용들도 사실처럼 언급돼 불리하다”며 “수사기관이 흘려서 기사가 난 뒤 이를 증거 자료로 붙이는 게 검찰이다, 법정에서 이를 해명하고 반박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법원 고위 관계자 역시 “언론에 언급되는 큰 사건의 경우 사건을 맡기 전 언론 보도를 보면 이미 선입견을 가지고 사안을 접하게 된다”며 “공소장도 갈수록 자극적이고 선입견을 심으려는 심증적 표현들이 늘어가는 것이 문제가 되는 만큼,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하고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고유정 사건으로 한정할 경우 ‘공익적 가치가 크다’는 반론도 적지 않았다. 형사부 경험이 많은 한 검사는 “이번 사건의 경우 기소 이전에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는 신상정보 공개가 결정됐을 정도로 공익과 국민 알권리가 크다고 본 경우 아니냐”며 “평범한 시민의 소소한 범죄를 구체적으로 언론에 알리는 경우에는 피의사실 공표를 더 엄격히 적용할 필요가 있지만, 고유정 사건과 같은 경우 더 구체적인 범행 과정 공개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게 악의적인 범죄에 대해 수사당국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검사장 출신의 변호사 역시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때는 매일 브리핑을 통해 기자들에게 범죄 혐의를 미리 확인해줬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다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하냐”며 “큰 사건의 경우 범죄 예방 효과를 볼 수 있다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공보를 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언론 보도 기준’과 ‘피의자 인권 보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법조인 모두가 이견이 없었다. 앞선 법원 고위 관계자 등 모두는 “큰 사건과 작은 사건을 나눌 기준이 필요하고, 각각의 판단에 따라 기소 전에 어디까지 언론에 공개해도 될지에 대해서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보니 문제가 된 것”이라고 입을 모아 지적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