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득 불출마 요구 55인 서명 파동 실패…“주동자 아니었지만 총대 메”
2000년 16대 총선에서 서대문구을에 출마했지만 4% 차이로 석패했다. 하지만 그때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나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고 서울시장 캠프에 합류한다. 2002년 지방선거 당시 선거 캠프를 진두지휘하며 이 전 대통령 승리에 일등공신으로 꼽혔다.
이 전 대통령 서울시장 재임 시절 정 전 의원은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고, 2004년 서대문구 을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이어져 2007년 대선에서 친이계 핵심으로 이명박 후보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다.
당시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를 앞장서 공격하며 ‘저격수’로 활약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태민 씨와의 관계를 두고 ‘박근혜 후보 좋아하는 분들은 밥도 못 먹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정 전 의원은 이명박 후보 캠프 선대위 기획본부장, 전략기획 총괄 팀장으로 활동해 대통령 당선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았다. 그는 MB 정권 핵심 실세이자 ‘왕의 남자’로 불렸다.
하지만 영광은 잠시였다. 정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 당선 직후 인수위 시절부터 권력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 전 대통령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 측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렸다는 게 정설이다.
정 전 의원은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이상득 전 의원 불출마를 요구하는 55인 서명 파동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2016년 회고록에서 ‘처음에는 주동자가 아니었으나, 주동자를 자임했다. 이상득 한 명 때문에 55인이 다 궁지에 몰렸기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그래서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생각했다”고 적은 바 있다. 이때부터 정 전 의원은 MB 저격수로 돌아서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가시밭길로 들어간다. 자신이 만든 정권으로부터 사찰을 당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던 그는 저축은행 불법 정치자금 의혹 사건에 휘말려 검찰 수사를 받았다. 이로 인해 2013년 1월부터 10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정 전 의원은 2014년 11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때부터 우울증이 그에게 찾아오게 된다.
절치부심하던 정 전 의원은 2016년 총선에 도전해지만 고배를 마셨다.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이 수도권에서 거의 괴멸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았고, 정 전 의원도 낙선의 쓴맛을 보게 된다. 정 전 의원은 이때 낙선하면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토로한다.
낙선 뒤 그는 방송인으로 변신해 김유정 전 의원과 함께 TV조선 ‘이것이 정치다’ 진행자로 나섰고, 각종 방송과 라디오에 활발하게 출연했다. 정 전 의원이 MB나 박근혜 전 대통령을 두고 말한 평론이 여러 번 적중하면서 ‘정치보다 정치평론이 낫다’는 말도 듣게 된다.
소신을 지켰기에 파란만장하게 살아왔고 그래서 가시밭길을 걸었던 그의 죽음에 여야를 불문하고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사망 당일 방송 출연을 펑크내지 않고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그의 생과 닮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준일 ‘뉴스톱’ 대표는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 당일까지 할 일을 완수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책임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추모의 글을 적었다.
평소 정 전 의원과 친분이 있던 장예찬 시사평론가는 “정두언 전 의원에 대한 공통된 평가는 ‘합리적인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이기 때문에 정두언은 늘 외로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할 말은 하는 태도가 기존 정치권에서는 눈엣가시로 여겨졌다. 보수 진보 모두 정두언을 추모하는 지금, 할 말은 하는 합리적 정치인들을 소중히 여기는 게 정두언 정신을 기리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