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장이 진급심사 있다며 의병제대 만류“…전역 후 ‘유공자 인정’ 행정소송 진행했지만 기각
피해보상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박준영 씨. 가스주입술 덕분에 겉으로 보기에 눈동자는 멀쩡해 보인다.
특히 첫째 주 일정이 강도 높은 체력을 필요로 하는 훈련이 많아 친해질 시간도 부족했다. 둘째 날도 역시 하루 종일 산에서 훈련을 이어 갔다. 그때 옆 자리에 있던 윤 상병이 ‘아, 약을 깜빡했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박 씨는 ‘감기약을 깜빡했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박 씨는 취침 시간이 되자 정신 없이 잠에 빠져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윤 상병이 ‘렘 수면 장애’ 흔히 말하는 몽유병을 앓고 있어 소속 부대에서도 자다가 욕을 하거나 부대원을 때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윤 상병은 마약성 약을 꼭 복용해야 하고 이 약은 지휘관이 보관하고 있다가 자기 전 한 개씩 지급하는 방식이었는데 윤 상병이 파견을 오면서 이 약을 빠트린 것이다.
박 씨 어머니는 “가해자가 약을 직접 보관한 것이 아니고 상황실에서 보관하여 매일 점호시간이 끝나면 주는 약이었다. 즉, 전적으로 부대에서 관리하는 약이다. 당사자가 교육훈련 대상이면 당연히 가지고 가도록 챙겨줘야 하는데 확인하지 않은 과실이 있고 해당 중대장이 진술서에 자필로 자기과실을 인정한 기록도 있다”고 말했다.
사건은 그날 새벽 시작됐다. 새벽 1시쯤 옆에서 자던 윤 상병이 박 씨 상체에 마운트 자세로 올라타 안면에 무자비하게 주먹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박 씨는 “완전히 곯아 떨어졌기 때문에 올라탔을 때 반응이 늦었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너무 맞아 어지러워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박 씨는 안면 타격이 이어지는 와중에 억지로 윤 상병을 밀쳐 넘어트렸고 윤 상병은 그대로 코를 골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박 씨 내무반은 컨테이너 구 막사였기 때문에 어두컴컴했고 눈가의 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박 씨는 관물대를 치며 불침번을 불러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당시 당직 사관은 중위였고, 박 씨 눈을 보고 그도 당황했는지 타 중대 고참 당직 사관을 데려왔다. 박 씨는 일단 사단본부 의무대로 보내기로 했다. 박 씨는 의무대로 이동했지만 하필 당시 의무대 당직은 정신의학과 군의관이었다. 당직 군의관은 ‘안와골절이 의심되니 아침에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하자’고 했고 박 씨는 의무대에서 아침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박 씨는 국군수도병원에 갔지만 대기와 검사가 반복됐고 의사를 만난 건 오후가 돼서였다. 박 씨는 그때까지 상처가 심하겠거니 생각했지만, 그곳에서 만난 군의관은 ‘실명 가능성이 있다. 가족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박 씨는 그때서야 전화로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때 박 씨 부모는 박 씨가 이런 사건을 당했음을 처음 알게 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사건 발생 뒤 가해자 부모에게는 바로 연락했으나 피해자 부모에게는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군의관은 박 씨에게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다. 여기서도 치료가 가능하다. 원한다면 민간 병원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군 병원 이미지도 안 좋고 하니 민간 병원에서 치료 받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 당장 부대 밖으로 나가 민간 병원에서 교수급을 만나 치료 받아라. 출타할 수 있는 진료 결과를 내가 바로 써주겠다’는 권유를 했다. 박 씨는 “다시 부대로 복귀해 진료 결과를 보여줬지만 당시 행정보급관과 소대장이 ‘지금은 밤이 늦었으니 휴가증을 내줄 수 없다. 내일 아침에 나가라’는 말을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이 항의차 부대에 방문하고 나서야 본부대장이 바로 긴급 출타증을 써줘서 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 씨 부모는 “폭행사건이 발생하고 신속하게 병원에 후송해야 하는데 장시간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상태로 있었다. 안구 출혈이 심해 동공에 피가 가득 고여 상태를 악화시켰다. 바로 구급차로 후송했어야 하는데 사고 당시 군의관이 경미한 사고로 생각하여 다음 날 전 부대원들을 함께 모아 수도병원으로 향하는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응급 처치가 지연됐다”고 말했다. 그나마 가스 주입술을 하지 않았다면 한쪽 눈동자 색깔도 하얗게 됐을 것으로 예상됐다.
이어 박 씨 부모는 “또한 수도병원에서 실명될 수 있으니 교수급이 있는 대형병원으로 가야 된다는 것을 응급차로 후송하지 않고 부대로 다시 복귀시키고 사건사고가 외부에 알려질까 두려워 방치한 뒤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었고 부모가 부대에 찾아가 항의하자 마지못해 가족에게 인계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집으로 가게 된 박 씨는 삼성서울병원에 김상진 안과 교수에게 진료를 받게 된다. 박 씨는 “하루 종일 검사를 해야 했던 국군수도병원과 달리 30분 안에 모든 검사가 끝났다. 김 교수에게 ‘국군병원에서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는 소견을 들었다’고 하니까 김 교수가 ‘눈은 함부로 수술하는 게 아니다’고 딱 잘라 말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대처가 잘못됐다. 즉시 조치를 했어야 했다’며 ‘상처가 난 지 이틀 이상 지나 눈 속 피가 굳기 시작해 방법이 많이 없다. 눈 안에 가스를 주입해 피를 밀어내 잠시나마 눈을 살려두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한다.
이 치료 방법에 따라 박 씨는 눈에 가스를 주입했고 눈 안에 가스가 흔들려 충돌이 발생할까봐 한 달 동안 그는 엎드려 생활해야 했다. 그렇게 치료를 받았지만 수술 받은 눈으로는 낮과 밤을 구별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대에서 곧바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때 마침 언론사에서 이 사건을 알게 됐고 ‘몽유병 환자에게 실명한 병사’로 거의 모든 언론에 박 씨 사건이 보도된다. 부대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더 이상 복귀를 종용하지 않게 됐다. 박 씨는 1개월간 치료를 받고 부대에 복귀했을 때는 군 생활이 4개월 남아 있었다.
2015년 당시 박준영 씨 사건을 보도한 ‘MBN’ 기사 자료화면.
그는 의병 제대를 하려고 했지만 부대장은 ‘장애는 사고 후 6개월을 봐야 하고 4개월 남은 상황이기 때문에 만기제대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마지막 진급 심사가 기다리고 있다’는 간곡한 만류도 받게 된다. 특히 부대장은 집까지 찾아와 ‘끝까지 국가 유공자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진급한 뒤 다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또한 박 씨 부모가 변호사에게 자문해 본 바에 따르면 부대장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쨌건 당시 박 씨는 4개월 참고 견디기로 한다. 이 선택이 마지막에 그의 발목을 잡는다.
꼬박 4개월을 채우고 전역 한 박 씨는 국가 유공자를 신청한다. 특히 소속 부대 지휘관들이 윤 상병의 질병 여부를 전달하지 않았고 약도 깜빡하는 등 지휘 체계가 실수 투성이였고 사고 후 대처도 안일했기 때문에 국가가 배상하라는 취지로 보훈청에 국가 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탈락했고 이에 행정 소송을 시작한다. 특히 그가 받은 분대장 훈련파견은 부대자체에서 실시하는 것이 아니고 타 부대에 위탁되어 훈련받는 것으로 ‘분대장 파견 교육 훈련’이라고 명시돼 있어 훈련 상황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박 씨는 보상을 요구하며 소송을 진행했지만 소송 과정에서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군의 생각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군은 황당하게도 법정에서 ‘만기 전역을 한 만큼 군대 내 부상이 심각한 게 아니었다’는 입장을 내놨다. 박 씨는 “법정에서 ‘정말 심각했다면 만기 전역이 가능했겠냐’며 군이 그 부분을 물고 늘어졌다”고 떠올렸다.
박 씨는 “부대장이 워낙 만류했고, 사고를 당한 뒤 시력인 ‘교정 시력’이 나오기까지 6개월이 걸린다고 해 전역까지 남은 4개월을 버텨 만기 전역을 했는데 그때 선택이 이렇게 작용할 줄 몰랐다”며 “또한 부대에서는 분명히 국가유공자가 될 것이며 어려움을 겪으면 끝까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진급 이후에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고 후회했다.
박 씨는 “윤 상병은 뉴스가 보도되면서 곧바로 의병 전역했는데 정작 나는 전역하지 않았다. 나는 윤 상병이 다른 게 아니라 병 때문인 걸 알고 ‘처벌을 원치 않고 치료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탄원서까지 써줬다. 그런데 군이 이렇게 활용할 줄 몰랐다”고 답답해 했다.
군에서는 취침도중에 사고가 발생한 건 예외라는 입장이다. 훈련, 경계근무, 전투체육, 일과시간 어디에도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박 씨는 “‘전투체육’이라고 해서 축구하다 다친 건 인정을 해주는데 파견 훈련 기간 중 당한 부상은 인정을 안해주고 있다”고 억울해 했다.
소송을 진행하며 사건기록을 열람하면서 새로운 사실도 알았다. 박 씨 부모는 “헌병대 수사관이 집에 찾아와 조사를 했다. 그때 가해자인 윤 상병 부모가 ‘어려서부터 몽유병 증세가 있어 여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처음부터 군대를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한 게 생각났다. 그래서 ‘가해자도 일종의 피해자일 수 있다. 처벌 대신 선처해주고 관리 잘못으로 인한 지휘관을 처벌해 달라’고 강력 요구했다. 하지만 나중에 사건 기록을 열람하니 그런 문구는 없었다”고 말했다.
박 씨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 행정소송을 진행했지만 1심과 2심에서 모두 기각됐다. 법원도 ‘취침 중이라 어쩔 수 없고 훈련 상황이라고 해도 취침은 훈련상황에 포함이 안된다’며 기각했다.
일단 박 씨는 먼저 피해보상을 받기 위해 다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군은 가해자인 윤 상병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고 있고, 윤 상병은 현재 제대로 생활조차 어려운 상황이라 보상을 해줄 수 없는 상황이다.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윤 상병 또한 법원의 명령에도 정신 감정을 받길 거부하고 있어 재판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박 씨는 일단 보훈 대상자로 포함된 상태다. 박 씨는 “내 과실이 전혀 없는데도 손해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 수도병원에서는 교수급이 진료하는 큰 병원에 가서 빨리 수술을 해도 실명될 수 있다고 하며 민간병원으로 가도록 했지만 정작 민간병원으로 갔다고 치료비를 전혀 지급하지 않고 있다”며 “평생 장애를 앓고 살아가야 하는 나로서는 정당한 보상을 원할 수밖에 없다. 젊은 나이에 분대를 책임지라는 명령에 훈련을 받으러 갔을 뿐인데, 장애를 얻고도 국가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 꼭 국가에서 버려진 기분이다”라고 씁쓸해 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