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 경제개발 시대엔 정관계와 사돈 맺기…자본권력 성장하며 ‘자유연애’ 부쩍 늘어
재계 1~2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정·관계와 혼맥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최태원 SK 회장(왼쪽)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과 혼인했으나 현재 이혼소송을 밟고 있다. 연합뉴스
재계 혼맥은 1950년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인 창업주 1~2세, 8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3~4세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부모세대, 후자는 자녀세대로 나눌 수 있다.
# 정·관계와 막강 혼맥으로 큰 기업들
창업 1~2세대 혼맥은 정·관계를 시작으로 재계·언론계까지 복잡하게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아들 이건희 회장은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부·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 씨의 장녀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결혼했다. 홍진기 전 장관은 일제강점기 시절 판사였다가 장관을 역임했으며 중앙일보 회장도 지냈다. 슬하에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홍석조 BEF리테일 회장,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 홍라영 전 삼성미술관 리움 총괄부관장을 두고 있다.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전 관장의 결혼에는 정·관계는 물론 재계와 언론계까지 얽혀 있다.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도 강태영 여사와 사이에 둔 2세들을 통해 정계와 연을 맺었다. 장녀이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큰누나 김영혜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최고 실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차남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과 결혼했다. 한화는 김승연 회장의 혼인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도 연결된다. 김승연 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 당시 권력의 중심이었던 서정화 전 내무부 장관의 딸 서영민 씨와 연을 맺었다.
SK그룹의 혼맥도 화려하다. 최종건 SK그룹 창업주의 막내딸 최예정 씨는 이후락 전 부장의 5남인 이동욱 씨와 결혼했다. 최종건 회장의 동생인 최종현 선대회장의 장남 최태원 SK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과 혼인했다. 다만 최 회장은 현재 노 관장과 이혼소송을 밟고 있다.
창업세대들이 정·관계와 혼맥 쌓기에 힘쓴 이유는 당시 한국 경제가 정치권력에 의존해 성장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재벌기업 대부분 해방 이후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 기업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로부터 불하 받아 기초를 마련했다. 이때 해당 기업과 이해관계가 있는 경우 불하 대상자로 우선 선정됐기에, 이들은 관련 정치인이나 담당 관료 등과 상당한 결탁이 있었다.
또 전쟁 직후 한국 경제는 자본력이 없었기에 원조물자에 의존해 성장했으며, 원조 공여국들의 의지에 따라 경제구조가 결정됐다. 원조물자를 공급받은 기업체 중 다수가 재벌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고, 이들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등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정부 주도 경제개발 체제 아래 각종 지원과 특혜를 받기 위해 고위권력과 결탁하려 힘썼다.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 박주근 대표는 “한국전쟁 이후 자본력이 없다 보니 미국의 원조자금을 누가 받아오느냐가 기업 성장의 기초였다“며 ”정부 고위 관료나 힘 있는 권력기관과 유착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에 1~2세대들은 정·관계를 중심으로 혼맥이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왼쪽부터)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서현 이사장의 남편인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전 남편 임우재씨가 이혼소송 전 삼성 행사장에 모인 모습. 김재열 사장은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차남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 이해관계 벗어난 자유연애로
고위 권력에 쏠린 혼맥 경향은 1980년대 후반부터 달라진다. 자녀 세대인 재벌 3~4세들은 정·관계와 결탁하기보다 재계간 인연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손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장녀 임세령 대상 전무와 연을 맺어 세기의 결혼으로 화제가 됐다. 그러나 11년 만에 합의 이혼했다. 한화 창업주의 장녀 김영혜 씨와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의 장남 이재환 씨는 손경식 CJ그룹 회장 딸 손희영 씨와 혼인했다. 손경식 회장의 장남 손주홍 씨는 노스페이스로 유명한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의 3녀 성가은 씨와 연을 맺었다.
자녀 세대로 넘어오면서 정·관계와 연이 약해진 이유는 자본권력이 사회 주도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3저 호황’의 시대(1986~1988)를 거쳐 자본권력이 급성장하면서 정·관계와 연결고리가 크게 필요하지 않게 된 것. 사회 주도세력이 경제인이 중심이 되면서 재벌들이 세력을 넓히고자 같은 재벌끼리 연결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그러나 이마저도 다른 측면에서 ‘정략결혼’이라고 할 수 있다. 재벌 4세로 내려오면서 온전한 ‘자유연애’와 결혼 사례가 부쩍 늘어난다. 자본권력의 성장으로 정·관계와 결탁할 필요성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재계간 결합에 따른 사업적 시너지도 줄었기 때문이다. 박주근 대표는 “창업 1~2세대들은 형제가 하는 사업을 피했지만, 최근에는 형제 남매간에도 같은 업종을 영위하다 보니 재계간 결합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재벌 오너 일가에서는 해외 유학파 출신이 늘면서 유학시절 만나거나 학교 동창과 연애하다 결혼한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손자 박세창 아시아나IDT 사장은 2003년 중학교 동창인 김현정 씨와 혼인했다. 이들은 연세대 입학 후 6년 넘게 연애 후 결혼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장녀 이경후 CJ E&M 상무도 연애결혼했다. 해외 유학시절 평범한 가정의 아들인 정종환 씨를 만나 2008년 연을 맺었다.
회사에서 만나 연애하다가 결혼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평사원 출신인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의 결혼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5년째 이혼소송 중이다. 한화그룹 3세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도 사내에서 만난 일반인 여성과 연애하고 올가을 결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무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차장으로 입사할 당시 동기로 만났다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승연 한화 회장의 동생인 김호연 전 빙그레그룹 회장의 장남 김동환 빙그레 차장도 2017년 일반인 여성과 식을 올렸다. 김 차장 역시 사내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진 경우로, 신부는 2010년 빙그레에 입사해 식품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관계나 재계간 사돈을 맺으며 사업을 키워나가던 시대는 이제 지났으며 자녀의 해외 유학 비중이 높아지면서 사고방식이나 문화가 변했다“며 ”아울러 정략결혼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생겨나면서 혼인관계가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