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간 묻혀있던 유골 DNA 채취 여부 미지수…사인도 범행동기도 범행도구도 오리무중
#아직까지 밝혀진 건 타살이라는 사실뿐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정확한 명칭은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이다. 사건은 1991년 3월 26일 벌어진다. 지방자치선거로 공휴일이었던 그날, 우철원 군(당시 13세) 등 어린이 5명이 도롱뇽 알을 채집한다고 집을 나서 와룡산을 향했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마을 저수지를 지나 와룡산으로 올라간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5명의 아이가 실종됐고 그들에게 ‘개구리소년’이라는 명칭이 붙으며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됐다. 대대적인 수색과 수사가 이어졌지만 결국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2002년 9월 26일 개구리소년이 발견됐다.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갔던 주민이 이들의 유골을 발견한 것. 사건 발생 11년 만의 일이다.
개구리소년 유골 발굴 현장. 사진=일요신문DB
유골 발견 직후 경찰은 ‘저체온 현상에 의한 자연사’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다. 당연히 유족들은 반발했다. 유족들은 사건이 벌어진 1991년도를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경찰은 실종이 아닌 가출로 추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결국 경찰의 와룡산 일대 수색작업이 시작된 것은 실종사건 발생 7개월여 뒤인 1991년 10월 중순이었다. 유족들은 경찰이 사건 수사를 빨리 매듭짓기 위해 실종 당시에는 ‘가출’, 유골 발견 이후에는 ‘자연사’로 추정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2002년 11월 12일 경북대 법의학팀이 법의학 감정 중간 보고회에서 유골 감정 결과 타살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소년들의 유골 5구 가운데 3구 이상의 두개골에서 사망 당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인위적 손상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2003년 당시 일요신문과 만난 경북대 법의학교실 채종민 교수는 “타살을 확신한 것은 지난해(2002년) 10월 10일경이었다. 개인적인 소견을 전제로 ‘타살’을 수사 관계자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유골 발견 초기 시점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으로 자연사를 추정했던 경찰은 타살이라는 공식발표가 나올 때까지 타살 가능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나마 사건 발생 당시 사체와 증거품 등을 확보해 놓은 화성연쇄살인사건과 달리 개구리소년사건은 사체, 아니 유골조차 11년여 만에 발견됐다. 그만큼 증거도 없다. 유골 발견 당시 확보된 증거는 유골과 어린이용 신발 4켤레, 손목시계, 운동복 등 옷가지 10여 점, 그리고 보철 치아 2점 등이 전부다. 그것도 11년여 만에 땅 속에서 발견했다. 국과수에서 당시 발견된 유류품을 대상으로 DNA 검사를 실시할 예정인데 과연 DNA 채취가 가능할지, 아니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발굴된 개구리소년 유골의 두개골에서 사망 당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인위적 손상 흔적이 발견됐다. 일요신문 DB
그렇다면 당시 유골을 감정한 경북대 법의학팀과 국과수에서는 사인을 어떻게 추정했을까. 핵심은 유골 5구 가운데 3구 이상의 두개골에서 발견된 인위적 손상 흔적이다. 사망 당시 생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떻게 이런 인위적 손상이 생겼는지까지는 밝혀지지 못했다. 다시 말해 아직도 사인은 미상이다.
2002년 당시 가장 눈길을 끈 부분은 총기류에 의한 사망설이다. 게다가 유골 발견 당시 현장에서 탄두와 실탄 등이 함께 발견됐다. 250m 떨어진 곳에 군 사격장이 있어 유탄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실종 당일은 지방선거일이라 임시 공휴일로 사격훈련이 없었다는 게 군 당국의 설명이다. 이후 개조한 산탄 공기총이나 그와 비슷한 총기류 등이 범행도구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처럼 사인이 명확치 않아 범행 도구에 대한 수사도 별다른 진척이 없다. 총기류가 범행 도구일 가능성이 부각됐지만 당시 대구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양한 물질을 탄환으로 사용해 수차례 실험했지만 산탄 공기총이나 유사 총기류로는 유골에 난 상처와 같은 모양의 흉터가 나지 않았다”며 “산탄 공기총이 범행 흉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당시 법의학팀은 불법 개조된 공기총과 손으로 내리칠 수 있는 둔기류 가운데 하나가 범행 도구로 추정된다는 입장이었다. 경찰이 실험을 통해 총기는 범행도구에서 제외했지만 법의학팀은 ‘ㄷ자’ 문형의 상처를 낼 수 있는 사제 공기총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개조한 산탄 공기총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또한 둔기류의 경우 ‘사각형의 예리한 모서리를 가진 물체’를 지목했다. 예를 들어 찍힌 모양 비슷한 가위가 흉기일 수 있다.
#‘용의자조차 없다’ 결정적 제보가 나올까?
사인이 불명확한 데다 범행 도구도 특정이 안 되는 사건이다 보니 범행 동기는 추정조차 불가능하다. 게다가 실종 당시나 유골 발견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 관련 증거도 거의 없는 현실이다. 자연스레 용의자도 없다.
유골이 발견된 2002년 대대적인 경찰 수사가 이뤄졌는데 당시 수사는 범행 도구와 목격자, 그리고 용의자를 찾는 세 방향으로 집중됐다. 당시 경찰은 대구의 공구상 밀집거리, 시내 건재상 그리고 성서공단 내 기업체의 개조공구까지 조사하며 범행 도구를 찾았다. 또한 사고 당시 인근에 살고 있던 460가구를 대상으로 가구당 1∼2명씩 탐문 수사를 벌이며 목격자를 찾았다. 그리고 사건 발생 시점을 즈음해 인근에서 갑자기 행방을 감춘 사람이나 당시 근처 중고등학교에 다닌 불량 학생들의 신원을 파악하며 용의자 특정에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만 수사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결국 2006년 3월 25일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개구리소년 유골과 유류품들. 사진=일요신문DB
공소시효 만료 이후에도 경찰은 계속 수사를 이어왔지만 결국 2015년 12월 내사 중지 상태로 전환했다. 그렇데 경찰 수사가 끝났지만 2019년 4월 대구경찰청 미제사건 수사팀이 다시 수사 기록을 검토하며 첩보 수집 활동을 시작해 최근 본격 재수사에 돌입했다.
9월 20일 개구리소년 유해 발굴 현장을 방문한 민갑룡 경찰청장은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추가 제보와 사건 당시 남겨진 증거 자료 등을 토대로 재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재수사를 공식화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가 특정된 직후인 터라 더욱 관심과 기대가 커지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사는 어렵다는 게 현실이다. 최근 화성연쇄살인사건 역시 제보가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듯이 이번에도 결정적인 제보가 등장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유가족들 가운데에는 공소시효 만료로 처벌을 받지 않는 범인이 양심고백이라도 하지 않을까 고대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조재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