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주민들 “돈 없고 빽 없는 애들 몇날 며칠 밟고 때려…경찰 무서워 외출도 못해”
사진=영화 ‘살인의 추억’ 영상 캡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가장 눈길을 끈 캐릭터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백광호(박노식 분)다. “향숙아!”라는 그의 대사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고 있다. 유력한 용의자였던 그는 불행히도 기차에 치여 사망한다. 백광호는 실존인물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였다.
실제 기차에 치여 사망한 용의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백광호처럼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는 주민 신고로 경찰에 체포됐고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한동안 경찰이 미행을 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혐의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경찰 조사를 받은 뒤 정신질환이 더욱 심해진 그는 결국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이처럼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경찰은 다양한 이들을 용의자로 특정하고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때리거나 잠을 안 재우는 것은 기본, 다양한 고문을 동원했다고 알려진다. 심지어 고문기술자로 악명 높은 공안경찰 이근안까지 화성살인사건 수사에 투입했을 정도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9차 사건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였다. 박해일은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제작된 몽타주와 비슷한 외모로 출연했다. 따라서 이춘재와 비슷한 비주얼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춘재도 몇 차례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영화 속 박현규처럼 유력한 용의자는 아니었다.
9차 사건 당시 박현규라는 캐릭터처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따로 있었다. 9차 사건 피의자로 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윤 아무개 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렇지만 윤 씨는 그 일을 겪고 7년 뒤 사망했다. 윤 씨의 가족들은 그의 사망이 경찰의 강압 수사 후유증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관련기사 [단독] ‘살인의 추억’ 박해일 실제모델 “경찰 수사 후유증으로 숨졌다”).
모방범죄로 처리된 8차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아 20여 년의 수감생활을 한 윤 아무개 씨 역시 경찰이 5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 등 온갖 고초를 가했다고 한다. 심지어 경찰이 ‘1년만 살고 나오면 된다’는 회유까지 했다고 한다(관련기사 [단독] 화성 8차 사건 윤 씨 측근 “경찰이 1년만 살고 나오면 된다고 했다”).
경기도 화성시 진안동 소재의 8차 화성연쇄살인사건 현장. 사진=최준필 기자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런 고초를 겪은 게 당시 용의자로 특정된 몇몇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화성 인근에 살던 남성들 가운데 상당수가 경찰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경찰서도 아닌 모텔방으로 끌려가 폭행과 고문이 난무하는 조사를 받았다고 토로한다. 그 시절 여성들은 화성연쇄살인범이 무서워서, 남성들은 경찰이 두려워서 외출을 거의 하지 못했을 정도라고 한다. 최근 화성에서 만난 시민들은 여전히 당시 경찰의 강압수사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현장에서 만난 이들이 들려준 ‘고문의 악몽’을 몇 개 소개한다.
당시 개인 사업을 하던 A 씨는 9차 사건(1990년 11월 15일)이 벌어진 날 수원역 근처 모텔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숙박을 했다는 이유로 용의 선상에 올랐다. 당시에는 모텔에 들어갈 때 ‘숙박 확인증’을 써야 했는데 그걸 깜박하는 바람에 의심을 받게 됐다.
“경찰은 당시 여자친구가 나한테 전화하도록 만들어 유도 심문을 하고 사무실에 도청장치 숨겨 놓고 그랬어. 아주 나쁜 놈들이야. 나는 안 맞았지만 당시에 돈 없고, 빽 없고, 부모 없는 애들 뾰족 구두에 밟히고, 갈비뼈 부러지고 난리도 아니었어. 아직도 기억해. 병점역 근처에 모텔인가, 여관인가 방을 하나 잡아가지고 경찰 놈들 수사본부로 썼다고. 거기서 사흘을 붙들려가지고 거짓말 탐지기도 하고 그랬어. 그때 내가 ‘너희가 나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 진짜 두고 봐라’라고 강하게 말을 했어. 내가 그때 사업을 하고 있었거든. 그랬더니 안 때리더라고.”
화성시 진안3통 노인정에서 만난 한 남성도 당시의 악몽을 들려줬다.
“아! 여기서 거기 털 안 뽑힌 사람 어딨어. (옆에 있던 지인을 향해) 너도 뽑혔지? 20~30대 사람들은 다 뽑아 갔다니까. 그것도 다 불려 가서 말이야. 내가 그때 경리 앞에서 얼마나 수치스럽던지. 그때 경찰이 수사 받았던 남자들 모아 놓고 술도 사주고 그랬어. 잘 먹고 다음날 따로 찾아와서 ‘한번 다시 좀 봅시다’ 그런다고. 그러면 벌벌 떨고 도망가고 그랬다니까.”
다음은 그 당시 부동산을 운영했다는 한 화성 토박이 남성의 얘기다. 그는 모방범죄로 처리됐지만 이춘재가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해 눈길을 끌고 있는 8차 사건 당시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 형사계장인가 수사반장인가 아무튼 여기 담당이었던 형사가 있었는데 우리 사무실을 수사본부처럼 쓰고 들락날락거렸어. 그럼 내가 김치 해주고 야식 다 챙겨주고 그랬지. 그러니까 나는 의심을 안 받았어. 그때 ‘윤○○’(8차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남성)을 범인이라고 잡았을 때 내가 그랬어. 아니 그 다리 불편한 애가 어떻게 그 높은 담을 넘냐고. 그게 말이 되냐고. 그랬더니 그냥 좀 있어보래. 그래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못했지.”
화성시 진안1통에서 만난 한 남성은 9차 사건 당시를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거기 털을 몇 번이나 뽑아 줬는데, 그럼 막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그랬었어. 아휴 말도 마. ○○이 사건(9차 사건) 때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경찰이 쫙 깔렸다고. ‘그 야산을 쭉 둘러싸고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고. 엉뚱한 애 잡아다가 현장검증 시키기도 하고 그랬었어. 경찰들 분위기가 말도 아니었어. 수사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게 뻔히 보였지만 우린 아무 소리도 못했지.”
경찰과 주민들 모두 화성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당시의 분위기는 너무나 매서웠다. 어떻게 같은 화성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화성에 같이 살고 있다. 화성시 병점에서 만난 한 남성이 들려준 얘기다.
“당시 형사들 가운데 화성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 타지 사람들이 많았지. 그 시절 형사 가운데 한 명은 전라도 사람인데 지금도 여기 병점에 살아. 요즘에는 산악회에서 같이 산에도 가고 술도 마시고 그래. 그런데 이제 와서 미안하니까 아무 소리 못한다고.”
그가 말한 그 형사도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의 얘기를 부인했다. “당시에도 법이 있었어요. 폭력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죠”라고.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인 반기수 경기남부청 2부장이 브리핑에 앞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검찰개혁을 둘러싼 이슈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 역시 검‧경 수사권 조정 등으로 얽혀 있다. 조국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를 둘러싸고 검찰이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가운데 경찰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찾아내고 자백까지 이끌어내는 쾌거를 올렸다. 이춘재가 유력 용의자로 특정된 직후 민갑룡 경찰청장은 대구 개구리소년 유골발견 현장을 찾아 다른 장기미제사건 해결에도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과거다. 이춘재를 유력 용의자로 특정하고 자백까지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던 경찰은 이춘재가 모방범죄로 종결됐던 8차 사건 역시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히면서 위기에 내몰렸다. 이 사건으로 이미 유죄 판결을 받고 무려 20여 년의 수감생활을 한 윤 씨는 영화 ‘재심’의 실제 모델인 박준영 변호사의 손을 잡고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다. 이를 계기로 당시 화성에서 자행된 경찰의 온갖 불법 수사가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살인의 추억’은 ‘진범 검거의 영광’으로 이어졌지만 결국 ‘고문의 악몽’까지 떠올리게 만들고 말았다. 그렇게 경찰은 중요한 대목에서 자신들의 과거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