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 나이 차 넘어 동등한 배우로 스크린에…김수안의 ‘재발견’과 굳건한 나문희
영화 ‘감쪽같은 그녀’ 제작보고회 현장에서 배우 나문희와 김수안. 사진=박정훈 기자
나문희는 눈빛으로 천 구절의 대사와 만 가지의 감정을 전하는 배우다. 그가 가만히 스크린 밖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을 때는 어떤 배경음악도 대사도 필요하지 않다. 아주 얕게 흔들리는 눈꺼풀과 눈썹 옆으로 솟아나는 핏줄만으로도 그가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려진다. 굳이 캐릭터의 과거사를 줄줄이 풀거나 엮지 않아도 그저 나문희가 서 있는 것만으로 서사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이다.
영화 ‘감쪽같은 그녀’에서 나문희가 맡은 ‘말순 할매’도 구구절절한 옛 이야기를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아주 짤막하게 언급되는 말순의 딸 이야기를 제외한다면 그들의 모녀 관계, 말순이 홀로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이 영화에서 그저 불순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문희가 ‘말순 할매’ 라는 사람으로 보여주는 맑은 장국 같은 연기가 굳이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탓이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말순의 지금의 삶이다. 돋보기 안에서 복작거리며 이어지는 말순 할매의 희로애락만이 관객에게 보이는 전부다. 여기에 갑자기 어디선가 뚝 떨어진 손녀 ‘공주’(김수안 분)가 등장하면서 말순의 1인용 삶이 풍성해진다. 폭풍 같은 손녀의 등장과 함께 104분 동안 휘몰아치는 말순의 감정 변화가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영화 ‘감쪽같은 그녀’ 스틸컷.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이 같은 감정의 변화는 말순의 정신과 깊이 연결돼 있다. 극중 말순은 치매를 앓으며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노인이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다가도 이내 평소처럼 다정하게 손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는 등 감정의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모습을 보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의 감정은 마침내 손녀의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밤이 돼서야 이를 깨닫고 제 뺨을 때리며 오열하는 신에서 폭발한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이 장면은 보는 사람마저 시선을 돌리게 할 정도로 힘겹다.
나문희는 지난 ‘감쪽같은 그녀’ 제작 보고회에서 이 영화의 출연 제의가 왔을 때 “몸이 굉장히 아프고, 마음도 외로웠다”고 밝힌 바 있다. 앞서 2017년 영화 ‘아이 캔 스피크’로 한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던 그였다. 쏟아지는 관심만큼 몸도 마음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말순’을 선택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나문희는 “‘이렇게 외로운 사람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는 마찬가지로 외로운 사람이 풀어내야 한다는 게 나문희의 말이다. ‘말순’이 되기 위해 그야말로 몸을 내던졌다. 극중 말순으로부터 나문희라는 사람을 온전히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영화 ‘감쪽같은 그녀’ 스틸컷.
그런 그와 함께 몸을 내던진 김수안의 연기도 결코 나문희에 밀리지 않는다. ‘부산행’ ‘신과함께-죄와 벌’로 최연소 쌍천만 배우의 자리에 오른 김수안은 능청스러운 ‘어른애’ 공주로서 말순 할매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켰다. 특히 극의 막바지에 이르러 말순과 공주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감정을 폭발시키는 신에서 김수안의 연기는 마치 아역이라는 틀을 맨주먹으로 깨부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나문희와 김수안, 두 기둥이 이끌어 가는 영화는 관객들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라는 빛바랜 질문을 던진다. 구식이고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누구도 명확한 답을 꺼내 놓지 못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셈이다.
허인무 감독은 “영화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떠오른 단어는 ‘함께’였다. 함께하기 어려운 이들이, 어울리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얼굴만 봐도 징글징글하지만 안 보이면 보고 싶고, 없으면 안 되는 것이 ‘가족’이다. 허 감독은 가족에 대해 “사람을 뜨겁게 만드는 존재”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이 답이 성에 안 찬다면 영화를 보고 관객 나름의 ‘가족’을 생각해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다.
한편 영화 ‘감쪽같은 그녀’는 72세 꽃할매 ‘말순’(나문희 분)이 생판 처음 보는 손녀 ‘공주’(김수안 분)의 날벼락 같은 등장으로 서툴지만 천천히 가족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나문희라는 품질보증서에 김수안이라는 도장이 찍힌 104분의 휴먼 드라마. 아역 배우들의 살과 귀여움이 넘치는 연기도 필견. 전체관람가, 12월 4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