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결핵 사망 김 이병 60년 만에 순직 처리…구타사망·교통사고 등 변·병사 최근 잇단 명예회복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일요신문] 1958년 5월 21일 김 아무개 이병은 입대 6개월 만에 군 병원에서 사망했다. 원인은 폐결핵이었다. 5남 2녀 가정의 장남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다. 군은 김 이병을 비순직 처리했다. 김 이병이 직무수행과 무관하게 병을 얻었다는 판단이었다.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는 2019년 11월 김 이병을 순직 처리해달라고 국방부에 요청했다. 60년도 더 지난 사안이었지만 판단 근거가 명확했다. ‘전사망자 사망구분 처리 기준표’였다. 1973년 마련된 이 기준표는 폐결핵이 순직 인정 질환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1955년 한 야전병원 의무대에서 군의관이 병사를 진료하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연합뉴스
초기엔 급성폐렴, 급성패혈증, 뇌출혈, 혈전증이 순직 인정 질환으로 기준표에 들어갔다. 3년 뒤인 1976년에 급성 폐결핵, 뇌막염까지 추가됐다. 이 규정은 이미 사망한 군인에게도 해당한다. 1958년 사망한 김 이병도 마찬가지다.
김 이병 유가족은 규정이 바뀐 사실을 몰랐다. 국방부는 1996년 변·병사자에 대한 사망 구분을 일괄 재검토했지만 행정 착오로 김 이병을 누락했다. 유가족은 긴 세월 끙끙 속앓이했다.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울분을 삭이면서도 고개를 푹 숙였다. 유가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근 위원회에 진정을 냈고 순직을 인정받았다. 홍보가 잘 됐거나 미숙한 행정 처리만 없었더라도 김 이병 명예는 40년도 전에 회복됐을지 모를 일이다.
김 이병과 비슷한 경우가 현재 4만여 건이다. 유가족 대부분은 방법을 몰라 군에서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지낸다. 죄책감과 상실감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군 창설 이래 군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아들은 23만 2397명이다. 그 가운데 비순직 처리된 군인은 3만 9436명이다. 비순직 군인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보상을 받을 수도 없다.
비순직 군인 3만 9436명 가운데 52%가량은 진정만 내도 순직 처리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비순직 군인 가운데 상당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해사망자이지만 사실 변사와 병사로 세상을 등진 군인이 더 많다. 자해사망은 1만 2844명(32%)이고 변·병사는 2만 715명(52%)이다. 변사는 사건사고, 병사는 병을 얻어 사망한 경우다.
자해사망 사건은 자료조사와 대면조사 등 긴 조사기간이 필요할 뿐더러 다툼의 여지가 있다. 당시 수사기록 접근이 어렵고 부대 책임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반면 변·병사인 경우는 인과관계가 비교적 명확하다. 최근 들어 과거와 비교해 직무수행 연관성을 높게 보고 본인 과실을 적게 반영하는 추세이기도 하다. 변·병사한 군인 유가족이 재조사 진정을 내면 상당수가 순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과거엔 명확한 규정이 마련돼 있지도 않았다.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곧바로 지휘관 인사 점수에 반영되기 때문에 의문을 남긴 채 마무리된 사건도 많았다. 오히려 지금 와서는 사건이 명확하고 간단하게 풀릴 수밖에 없다. 김 이병 말고도 과거 변·병사로 사망한 뒤 비순직 처리됐다가 최근 순직으로 인정받은 사례가 더 있다.
#후임에게 폭행당해 사망한 임 상병
칼빈 소총 자료 사진. 1992년 광주북부경찰서 관계자가 탈취된 소총을 되찾고 발표하는 사진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연합뉴스
임 상병은 사건 당일 새벽 경계 근무 순찰을 하고 있었다. 초소에 있어야 할 후임 김 아무개 일병이 보이지 않았다. 김 일병은 근무지를 벗어나 취사장에서 불을 쬐고 있었다. 화가 난 임 상병은 손에 들고 있던 목봉으로 김 일병을 두 대 때렸다. 이에 격분한 김 일병은 임 상병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의 칼빈 소총 개머리판으로 임 상병 후두부를 가격했다. 김 일병은 쓰러진 임 상병 위로 올라타 목봉으로 얼굴과 뒤통수를 수차례 때렸다. 임 상병은 3일 뒤 사망한다.
사단 고등군법회의는 김 일병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고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사망한 임 상병은 비순직 처리됐다. 후임을 먼저 때렸으니 사건 발생에 원인을 제공한 ‘본인 과실’이 있다고 본 셈이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최근 다르게 판단했다. 위원회는 임 상병이 근무지를 이탈한 김 일병을 나무라는 과정에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직무수행과 연관성이 있고, 김 일병의 보복행위가 임 상병의 구타행위에 대한 정당방위가 아니기 때문에 임 상병 개인 과실이 크다고 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차에 치여 ‘간파열’로 숨 거둔 안 일병
안 아무개 일병은 사건 일주일 전 14일 동안 긴 휴가를 다녀왔다. 보급부대에서 근무하던 안 일병은 늦게까지 잔업을 이어갔다. 1958년 8월 21일 오후 6시쯤이었다. 보급품을 나르던 안 일병은 차에 치였다. 군 병원으로 호송됐지만 다음날 ‘간파열’로 사망했다. 5남 3녀 장남의 마지막이었다.
‘전사망자 사망구분 처리 기준표’ 제10항은 ‘공무수행 중 본인 고의 중과실에 의하지 아니한 재해로 사망자’는 순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안 일병은 ‘공무 중 부상에 의한 사고사’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순직 심사 대상이 되지 못했다. 국방부가 1996년 변·병사자에 대한 사망 구분을 일괄 재검토할 때도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안 일병 유가족은 최근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위원회는 60년 전 기록을 샅샅이 찾아낼 순 없었지만 결론을 내리기엔 충분한 근거를 찾았다. 작업을 하던 안 일병이 ‘차량 사고’로 실려 왔다는 군 병원 기록을 발견했다. 위원회는 1958년 당시 열악한 작업 환경과 낙후된 의료기술 아래에서 안 일병이 공무수행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지만 회복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김민경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대외협력과장은 “과거에는 순직 대상이 아니었던 사건도 현재는 규정이 개정되고 판단 기준이 바뀌면서 순직이 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 사례처럼 군 복무 중 병사나 변사로 순직 인정이 마땅하나 업무 처리 상 과실로 순직 결정을 받지 못한 망인과 그 유가족들이 많다고 생각된다. 지금이라도 꼭 진정을 내서 명예를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