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시스템 오작동 빈번”…한국영화아카데미 진상조사단 구성
배우 윤지혜가 작심하고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호흡’을 비판했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겪은 힘든 일을 토로하는 수준을 넘어 “능력 없고 욕심만 앞선” 신인 감독과 그들을 지원하는 한국영화아카데미까지 공개적으로 저격했다. 주연배우가 개봉을 앞둔 영화를 비판하는 일이 극히 드문 데다, 표현이 워낙 자극적인 탓에 논란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영화계에서는 “점검해봐야 할 문제 제기”라는 의견과 함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지적이 맞붙고 있다.
12월 19일 개봉하는 영화 ‘호흡’은 14일과 15일 연이어 나온 윤지혜의 폭로로 인해 사실상 관객에 소개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가뜩이나 저예산 독립영화의 한계로 상영관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주연배우가 공개적으로 작품을 ‘불행 포르노’라고 지칭하면서 남은 관심마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호흡’의 제작을 맡은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외부 전문가들로 조사단을 꾸려 진상을 밝히겠다고 알렸다. 영화진흥위원회 산하의 영화감독 및 프로듀서 양성기관인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신인 감독과 배우들을 배출하는 산파 역할을 해왔다. 봉준호도 이곳 출신이다.
윤지혜. 영화 ‘호흡’ 홍보 스틸 컷.
#“능력은 없고 자존심만 있는 아마추어와의 작업 고통”
‘호흡’은 제작비 7000만 원의 저예산 영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권만기 감독의 졸업 작품이자, 장편 데뷔작이다. 영화는 과거 아이를 납치한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 정주가 죄책감에 짓눌려 살다가 12년 만에 그 아이와 재회해 겪는 악연의 이야기다. 윤지혜가 정주를 연기했다. 2017년 촬영을 마친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돼 실력 있는 신인감독에 수여하는 뉴커런츠상을 받았고 몇몇 해외영화제에 초청된 것에 힘입어 어렵게 개봉 일을 확정했다.
상업영화에서 활동하는 윤지혜를 제외하고 ‘호흡’의 출연진은 대부분 신인이나 무명 배우들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영화들은 보통 신인감독이나 재능 있는 연기자를 배출하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이제훈과 박정민을 배출한 영화 ‘파수꾼’, 변요한과 류준열을 발굴한 ‘소셜포비아’, 그리고 ‘죄 많은 소녀’ 등으로 그 명맥은 이어졌다. ‘호흡’도 흐름을 잇는 작품이다.
윤지혜가 열악한 환경이 예상되는 ‘호흡’의 출연을 결심한 이유도 이런 ‘기대’에서 비롯됐다. 그는 “초심자들과의 작업을 통해 배우로서 새로운 변화를 맞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한 달 동안 진행된 촬영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고통 그 자체”라는 것이 윤지혜의 설명이다.
윤지혜는 “촬영 초반에는 서로 합을 맞추느라 좀 삐걱거리기도 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현장 자체가 고통이 되어갔고 연기 인생 중 겪어보지 못한, 겪어서는 안 될 각종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극도의 예민함 속에서 ‘극도로 미칠 것 같은’ 연기를 해야 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 반복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달리는 자동차에서 도로에 내려야 하는 장면을 찍을 땐 “안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렇게 도로에 내린 자신을 피해 경적을 울리면서 빠르게 비껴간 택시도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또한 지하철역에서 허가를 받지 않고 “도둑 촬영”을 하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영화 ‘호흡’ 포스터
굳이 이토록 날선 비난까지 꺼내야 했을까. 윤지혜는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영화에 출연하려는 배우들이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존 상업영화 현장에서 느낄 수 없는 자극과 에너지를 기대하고 나서는 배우들에게 그 결심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짓인지’ 알리겠다는 의지다.
#윤지혜 vs 감독 입장 엇갈려…조사단 꾸려 진상 파악
현재 ‘호흡’의 권만기 감독과 스태프들은 윤지혜의 주장에 반하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사태 파악에 주력하던 한국영화아카데미는 논란이 증폭될 대로 증폭된 12월 16일 밤에야 ‘진상조사단 구성’을 알리고 사과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윤지혜가 촬영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밝힌 데 대해 무거운 마음으로 직시한다”며 “촬영현장에서 준법 촬영과 안전 확보의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만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호흡’의 촬영 현장에서 윤지혜가 지적한 불안함과 불편함이 발생된 것에 깊은 유감을 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윤지혜가 지적한 촬영 당시 문제에 대해서는 조사가 필요하다고 선을 그었다. 윤지혜를 포함한 제작진 모두의 목소리를 충분히 경청해야 하는 만큼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조사단을 꾸려 촬영 당시의 문제점들을 상세하게 되짚겠다고 설명했다.
영화계에서는 이번 논란이 ‘호흡’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저예산 영화, 신인 감독의 영화라는 사실 때문에 현장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도 그대로 넘어갈 때가 빈번했다는 증언도 있다. 영화계 관계자는 “언젠가 한번쯤 공론화해야 할, 곪고 곪아 터진 논란”이라며 “공개적으로 논란이 됐으니 건강한 방향으로 개선책을 마련하는 게 관건”이라고 짚었다. 윤지혜가 쏘아올린 공이 일방적인 폭로를 넘어 긍정적인 대안 마련으로 이어질지 관심이 집중된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