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탈 투혼’ 끝에 만들어낸 인간-동물 1인 2역의 완벽한 코미디…“허술해서 더 재밌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컷.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인간들이 동물 탈을 쓰고 동물인 척 연기한다는 기발한 설정의 웹툰 ‘해치지 않아(작가 HUN)’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여야 한다”는 동물 영화의 제1원칙을 초반부터 박살낸다. 누가 봐도 털옷을 입은 사람 티가 그대로 나는 등장인물들에게 속는 것은 극중 동물원 손님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해치지 않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이 두 발로 걷는 동물들이 만들어내는 개그의 조화 덕이다. 대사도, 화면전환도 완벽한 애정 신 속에 정작 등장인물들은 고릴라와 나무늘보라든지. 코카콜라를 실제로 벌컥벌컥 마시는 북극곰이 일약 SNS 인기 스타가 돼 동물원을 살리는 일등 공신이 된다든지. 어렸을 적 한 번쯤 상상은 해봤어도 실행에 옮기진 못했던 일들이 ‘해치지 않아’ 속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굳이 “저런 일이 어떻게 가능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차피 극중 등장인물들도 반신반의하면서 연기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심지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북극곰 역할의 안재홍과 기린 역할의 박영규, 사자 역할의 강소라와 고릴라 역할의 김성오도 그렇지만 이 가운데 만일 내년 연말 시상식에서 최고의 동물 연기자상이 만들어진다면 나무늘보의 전여빈에게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분장 상태가 완벽한 것을 떠나서 나무에 매달린 상태로 가만히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실제로 어딘가에서 나무늘보를 공수해 배우와 바꿔치기를 한 게 아닌지 쓸 데 없는 의심이 들 정도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컷
제작진 측에 따르면 이들의 완벽한 동물 연기를 위해 포기해야 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뿐이 아니라고 한다. 무게만 약 10kg에 달하는 동물 탈을 쓴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제대로 확보가 되지 않는 시야 속에서 ‘노 룩(No Look)’ 연기에 적응해야 했다는 게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다.
3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자양동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해치지 않아’ 언론배급시사회에 참석한 배우들은 ‘동물 역할’의 고된 점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초반의 북극곰과 기린 역할을 맡은 박영규는 “나이도 먹고 힘도 아무래도 없다 보니 실제로 힘들었다. 후반부에 물어 뜯고 싸우는 신을 내가 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인간으로서는 사육사 건욱을, 동물로서는 고릴라를 맡아 ‘혹성탈출’ 급의 연기를 선보인 김성오는 “탈을 쓰면 앞을 못 본다. 고개를 조금 숙여야 고릴라가 정면을 보게 된다”며 “이 각도를 익히는 데 중점을 뒀다”라며 연기의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다. 그의 상대역이자 막내 사육사 겸 ‘카톡’ 하는 나무늘보 전여빈은 “나무늘보 발톱이 굉장히 길어서 자유롭게 행동하기가 꽤 어려웠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컷
동물 역할 가운데 유일하게 정면만을 바라보며 미동조차 않는 사자를 맡았던 수의사 소원 역의 강소라는 이중에서 가장 티가 많이 나는 역할이었다고. 이족 보행이 가능한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사족 보행을 해야 하는 사자를 맡아 갈기로 최대한 몸을 가린 자세로 엎드려 있어야 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강소라는 “사자는 몸을 일으키면 티가 나서 은폐, 엄폐해야 하는 캐릭터였다. 사람으로서 동물 탈을 쓰는 걸 불편해 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극중 초짜 변호사 겸 신임 동물원 원장 강태수 겸 코카콜라 마시는 북극곰 역할을 완벽히 해낸 안재홍은 다른 배우들과 다르게 신나는 소감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는 “북극곰 슈트가 가진 무게감을 최대한 몸에 익혀서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보이길 바랐다”라며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동물의 슈트를 입게 돼 즐겁고 신났다. 덧붙이자면 한겨울에 촬영해서 더 좋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짠내 전문 배우’ 안재홍의 출연 덕일 수도 있을까. 인간들이 동물 흉내를 내고, 다른 인간들이 속아 넘어간다는 뻔한 스토리를 단순히 코미디에만 집중하지 않은 것은 ‘해치지 않아’의 특별한 점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이야기가 다소 급하게 전개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영화는 관객들을 향해서 묵직한 메시지를 하나 던진다. 극중에서 태수가 소원에게 퍼붓는 일갈에서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주제를 건질 수 있다. 동물원 속에 갇힌 동물들의 행복의 잣대를 누가 결정하고 누구의 손에 쥐어줄 수 있느냐의 문제는 동물원이 유지되는 한 계속 이어지는 숙제로 남을 것이다. 그나마 영화를 보며 안도할 수 있는 건 이 영화를 위해서는 희생되는 동물이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극중 수의사 소원과 어릴 적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온 북극곰이자 이 동물원에서 거의 유일한 진짜 동물 ‘까만코’ 역시 CG 기술로 만들어졌다. 코미디 장르를 표방하는 이 영화의 플롯 속에서는 ‘까만코’와 소원의 서사가 다소 튀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감독이 던지고자 한 영화 속 화두가 바로 이 ‘까만코’ 안에 있다고 했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컷
손재곤 감독은 “지금 인간들과 살아가는 야생동물에 대해 제 입장을 다루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서브플롯을 위해 북극곰을 CG로 만들었다. 다들 열심히 했는데 잘 전달이 됐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본의 아니게 2020년 다른 ‘동물 영화’들과 맞붙게 된 데에 대해서는 “예전에는 헐리우드에서 아이와 동물이 나오는 영화는 가능한 피하라고 했다. 통제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만 최근에는 VFX 기술이 발달해서 컴퓨터로 동물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앞으로는 더 많이 나올 것 같다”고 짚었다.
그러면서도 “다만 동물원 직원들이 슈트를 입고 분장해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설정은 전 세계 영화들 중 제가 아는 한에서는 본 적이 없다. 소재가 주는 신선함이나 개성은 저희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고 자부했다.
한편 ‘해치지 않아’는 생계형 수습 변호사 태수(안재홍 분)가 ‘동물 없는 동물원’ 동산파크를 살리기 위해 직원들에게 동물 위장근무를 하자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렸다. 동산파크의 마스코트 북극곰 ‘까만코’를 살리기 위해 사자 역에 동참한 수의사 소원(강소라 분), 동물원을 말아먹은 전 원장이자 모가지만 남은 기린 역의 서 원장(박영규 분), 험악한 인상에 그렇지 못한 일편단심 순정을 지닌 순정마초 고릴라 겸 고참 사육사 건욱(김성오 분), 남친 바라기 사육사 겸 나무늘보 그 자체 해경(전여빈 분)이 완벽한 인간과 동물 1인 2역을 맡아 관객들을 터뜨린다. 웃음이든 울음이든. 신스틸러 JH로펌 황 대표(박혁권 분)와 예민보스 CEO 민 상무(한예리 분)의 진지해서 더 웃긴 깨알 연기도 놓쳐서는 안 될 포인트. 117분, 12세 이상 관람가. 15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