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의 나홍진·‘호러’의 반종…“제발 영화관에서 나가게 해줘” 빌고 싶은 영화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의 ‘피’에 관한 석 달 간의 이야기를 담은 ‘랑종’은 태국 샤머니즘(무속 신앙)을 소재로 한다. 우리나라에선 매우 독특하고 생소하지만 태국에서는 종종 영화나 연극 소재로 쓰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 사회부터 자연에 이르기까지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고 그 신의 성격에 따라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력도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무속 신앙과도 맞닿은 면이 있다.
영화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따른다. 대대로 바얀 신이라는 조상신을 모셔온 랑종(태국어로 무당을 가리키는 말) 님(싸와니 우툼마 분)을 취재하던 취재진이 님의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 분)에게서 빙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신내림의 대물림으로 촬영 방향을 바꾸면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을 담고 있다. ‘블레어위치’나 ‘그레이브 인카운터’ ‘REC’ ‘패러노멀 액티비티’ 등 유사 장르의 공포영화가 그렇듯 극의 초반은 분위기만 다소 음산할 뿐 크게 긴장할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참여하고 있는 님 역시 빙의나 방언으로 무장한 무당이라기 보단 한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마음 좋은 아주머니의 모습으로 관객들의 심장을 무장해제 시킨다.
초반 10여 분 간 잊고 있었던 공포가 서서히 엄습하는 것은 님의 조카 밍에게서 기이한 행동이 포착되면서부터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거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을 호소하고 하혈을 계속하는 것은 님이 바얀 신을 받아들이기 전 신병으로 고통 받을 때와 흡사했다. 님의 언니이자 밍의 엄마인 노이(씨라니 얀키띠칸 분) 역시 바얀 신이 그를 다음 신내림 대상으로 지목했을 때 같은 일을 겪었다. 이처럼 피에서 피로 흘러내리는 신내림의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촬영진은 다큐멘터리의 주제를 님에게서 밍으로 변경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좇게 된다.
밍에게 포커스가 옮겨지는 그 순간부터 관객들은 ‘곡성’이 그랬듯, 어느 것에도 현혹되지 말고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공포 영화에 잔뼈가 굵은 관객들이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에서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결말에서 곱씹어 봤을 때 그 뜻을 다시 해석하게 되는 초반부의 대사와 장면을 생각한다면 어떤 신이든 반드시 포커스 바깥의 것까지 주목하는 것이 좋다.
문제는 이 두 감독들이 도무지 스크린에 제대로 집중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홍진 프로듀서의 디테일에 주목하려고 하면 반종 감독의 공포 탓에 눈을 뜰 수가 없다. 중반부부터는 모든 장면, 모든 음향이 공포다. 감시 카메라에 녹화된 화면을 이용한 호러 요소는 ‘패러노멀 액티비티’나 ‘REC’, ‘곤지암’ 등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소재일 것이다. 그러나 반종 감독이 손을 댔다는 것만으로 모든 익숙함을 ‘제로’로 돌려 버린다. 도저히 화면을 정면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신들이 단 3초도 쉬지 않고 관객들을 말 그대로 폭격한다.
그 감독에 그 출연진인지 이들 역시 정도를 모른다. 쉬엄쉬엄 연기해도 될 법한데 전력을 다해 관객들을 공포로 몰아넣겠다는 의지가 자막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신내림 전 평범한 삶을 살다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해가는 밍을 연기한 나릴야 군몽콘켓, 강력한 조상신인 바얀 신을 섬기며 조카를 되돌리기 위해 일생일대의 무속 의식을 벌이게 되는 님 역의 싸와니 우툼마의 열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여기에 가문 대대로 이어진 신내림을 거부했다가 딸의 고통을 불러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노이 역의 씨라니 얀키띠칸이 후반부에 감정을 폭발시키는 연기도 도저히 맨 정신으로 보기 힘들 정도의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한국 관객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이 배우들은 태국에서도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2일 ‘랑종’ 언론시사회 후 이어진 간담회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국내 취재진과 만난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은 “‘밍’ 역할을 맡을 배우를 뽑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태국에서 유명한 배우는 절대 안 되고, 실제와 가까운 배우여야 한다고 나홍진 프로듀서와 의견을 맞췄고 수많은 오디션을 거쳤다”고 말했다. 배우들의 얼굴을 스크린으로 봤을 때 그들이 맡았던 다른 캐릭터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작품의 리얼리티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님 역의 싸와니 우툼마도 스크린이나 TV보단 연극 무대에서 오래 활동해 온 베테랑 배우로 알려졌다.
리얼리티와 더불어 나홍진 프로듀서는 ‘랑종’을 제작하면서 전작인 ‘곡성’이 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도 무던히 애를 썼다고 했다. 무속을 담는 장면에서 ‘곡성’의 일광이나 무명과 겹칠 수 있는 부분을 철저히 분리했다. 나홍진 프로듀서는 “‘랑종’이 ‘곡성’과 흡사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무속을 담는 장면들이 많을 텐데 해당 장면에서 ‘곡성’과 차별화를 얼마나 시킬 지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고뇌를 그대로 보여주듯 ‘랑종’ 속 무속 의식은 ‘곡성’ 속 일광의 굿판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 이상의 스케일, 그리고 그 이상의 공포를 담은 이 영화의 백미가 됐다.
‘랑종’은 공개 전 영화등급심사에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것이 이슈가 됐었다. 특히 공포 측면에서 강한 수위가 지적됐고, 다소 선정적인 부분도 등급 심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수위를 조절하는 데 있어 제작진 사이에 내분(?)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홍진 프로듀서는 “저는 반종 감독님을 말렸다. 수위를 조금 낮추자는 입장이었는데 반종 감독님의 촬영대로 갔다면 아마 상영이 안 됐을 것”이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반종 감독은 “수위 관련해서 나홍진 감독과 많은 언쟁이 있었다. 절대로 잔혹함이나 선정적인 장면을 팔아서 흥행하고 싶지 않았다. 내용과 필요 없는 선정적인 장면은 넣지 않았고 스토리에 맞춰서 수위를 조절했다”고 했다.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공포의 측면에서는 수위가 조절되지 않은 것을 넘어서 고삐가 풀려버린 것 같다는 것.
한편 ‘랑종’은 ‘곡성’의 나홍진 프로듀서가 원안과 제작을, ‘셔터’로 태국 호러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연출과 공동 제작을 맡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공포 영화다. 앞서 ‘곡성’을 두고 나홍진 프로듀서는 “웃으라고 만든 코미디 영화”라고 자평한 바 있다. 반면 ‘랑종’을 소개할 때엔 “수려하고, 무섭고, 의미 깊은 영화”라고 말했다. 나홍진이 인정한 공포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코미디 요소를 한 세 군데 정도 넣었다고 하니, 진정 공포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이라면 러닝 타임 내내 눈을 감지 말고 하나씩 찾아 보도록 하자. 130분, 청소년 관람불가. 7월 14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