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유일한 증인 신원불상…진상위 “순리적 경로 복귀 직무수행으로 봐야” 순직 처리 의견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일요신문] 1983년 4월 18일, 휴가 복귀 날이었다. 상병 정기휴가는 15일. 긴 휴가는 꿀맛 같았다. 그렇지만 그 끝에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당시 서울 종로구 무학동에 살던 A 씨는 집을 나와 지하철 1호선을 탔다. 성북역에 내려서 신탄리행 경의선 보통열차를 타고 부대에 복귀하는 방법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A 씨 부대는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었다.
군 장병들이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연합뉴스
A 씨가 신탄리행 열차에 몸을 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참사가 발생했다. A 씨는 오후 7시 7분 열차를 탔다. 11분 뒤인 오후 7시 18분쯤 A 씨는 발을 헛디뎌 열차 밖으로 떨어졌다. 당시엔 보통열차가 출입문을 개방하고 달리던 때였다. 마침 열차는 회룡역을 통과해 높이 7m인 회룡천 철교 위를 지나고 있었다. A 씨는 그 아래로 떨어져 숨을 거뒀다.
이제 좀 내무반 생활이 편해질 때쯤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휴가에서 복귀하던 길이었다. 1981년 5월 26일 입대한 A 씨는 군대 생활 만 2년을 채우기까지 한 달 앞두고 있었다.
당시 군 헌병대는 A 씨가 떨어지기 직전 그를 봤다는 목격자를 찾아냈다. 이OO이라는 이름의 대학생이었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의정부 실업전문대 치기공과 2학년이었던 이OO 씨는 회룡역 바로 전 역인 망월사역에서 열차를 탔다. 학교에 가는 길이었던 셈이다.
이 씨는 A 씨가 만취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군 헌병대에 진술했다. 이 씨는 사건 발생 2분 전인 오후 7시 16분쯤 취한 상태로 승강구에 나가 혼자 노래를 부르는 A 씨를 보고 “군인아저씨 위험합니다”라고 만류했다. 이에 A 씨는 “괜찮다”고 했다고 한다.
군 헌병대는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A 씨를 ‘변사’ 그러니까 비순직 처리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휴가 복귀 중인 군인의 사고는 군인사법 시행령에 따라 직무수행 중 사고로 봐야 한다. 순직 처리 대상자다. 군은 A 씨 본인 중과실로 사고가 났기 때문에 직무수행 연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비순직 처리한 이유다.
유가족은 군 수사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A 씨가 술을 못 먹진 않았지만 휴가 복귀 날 술에 만취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술에 취해 휴가를 복귀한다면 당직사령에게 군기교육을 받을 게 불 보듯 뻔했다. 휴가 나올 때 술을 마시는 경우는 있어도 휴가 복귀하면서 술을 마시는 경우는 드물다.
열차 한칸짜리 비둘기호에 사람들이 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40년 가까이 동생을 마음속에 묻고 살던 A 씨의 형은 2019년 6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형은 동생 죽음에 남아 있는 의문을 말끔히 해결하고 싶었다. 동생을 국립묘지에 안장해주고 싶은 형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동생인 A 씨는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학생이었다. 1959년 1월 제주시에서 태어나 서울예전(현재 서울예술대학) 응용미술학과에 입학할 정도였다. 3남 1녀 가정 막내로 귀여움을 많이 받았고 말수가 적었지만 밝은 편이었다. 대학에 와선 초상화를 그려 동기와 교수에게 선물할 정도로 교우 관계도 원만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8월 이 사건 조사를 개시해 같은 해 12월 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A 씨를 순직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우선 위원회는 목격자였던 이OO 씨를 찾을 수 없었다. 위원회는 1975년부터 1984년 사이 의정부 실업전문대 치기공과에 입학한 사람을 전수 조사했다. 이OO은 없었다. 비슷한 이름인 이XX 등으로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OO은 당시 수사기록에 나타나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군 헌병대는 이OO 씨 외에 A 씨와 함께 술을 마셨다는 사람도, A 씨가 술을 마시는 걸 봤다는 사람도 찾지 않았다. 이OO 씨 진술은 A 씨의 중과실을 판단한 근거 자체였다. 당시 군 수사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위원회는 목격자 이OO 씨 행방이 묘연하고 복수의 증언이 없는 상황에서 A 씨가 음주를 했다는 사실을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음주를 했다고 하더라도 A 씨 부대 복귀 동선은 ‘순리적 경로와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A 씨는 택할 수 있는 최단 거리 동선을 택했다. 부대 복귀 방법 중 가장 빠른 열차를 택했다.
또 A 씨가 탑승했다고 추정되는 비둘기호나 통일호는 당시 운행 중에 열차 문을 누구나 개방할 수 있었다. A 씨가 음주를 했다는 가정을 한다고 해도 열차에 매달려있었단 사실만으로 망인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보기엔 무리다. 당시엔 입석 인원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더위를 피해 승강구로 나와 바람을 쐬는 일이 잦기도 했다.
A 씨 사례와 비슷한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례도 있다. 1993년 2월 판결이다. 정기외박을 얻은 임 아무개 일병이 열차를 타고 평택으로 향했다. 졸다가 제때 내리지 못한 임 일병은 달리던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승강장에 안착하지 못한 임 일병은 두개골 함몰골절로 사망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도 순직으로 인정했다.
또 휴가를 받아 집으로 향하는 열차 승강구에서 바람을 쐬다가 실족사한 군인도 순직을 인정받았다. 전용열차가 아닌 일반열차를 타고 숙소로 가던 길에 더위를 피해 승강구에서 바람을 쐬다가 사망한 군무원도 공무상 재해로 인정받았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대법원 판례에 비춰봤을 때 A 씨 또한 순직 요건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위원회는 군에 간 가족을 잃고 여전히 속앓이를 하고 있는 유가족들의 한을 풀기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