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끗발 날리던’ 정치 청년들 모아 18차례 재보선 기획…이인제·손학규 캠프 승리도 이끈 ‘선거 여론전 특공대’
1997년 4월 한보사태 청문회에 출석했던 한 증인의 말이다. 김영삼(YS) 정부의 ‘소통령’으로 불렸던 YS 차남 김현철 현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 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가 지휘하는 이른바 ‘광화문팀’에서 활동했던 A 씨 머릿속엔 여전히 이 말이 맴돈다. 그는 “김영삼 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해 청년 10여 명이 모여 김현철 지휘 아래 전국을 누볐다. 그 영향력은 지금 생각해도 상당했다”고 회상했다. A 씨는 “이들 중 일부는 당시 언론에 공개돼 조명을 받기도 했다. 그때 언론은 우리를 이렇게 불렀다”며 입을 뗐다.
“청와대 무적 비서관.”
‘김현철 별동대’라 불리던 광화문팀 본부로 통했던 서울 종로구 미진빌딩 2층. 사진=연합뉴스
김영삼 정부 출범 전 서울시 종로구 주택은행(미진빌딩) 건물 2층은 ‘김현철 별동대’ 본부였다. 김현철 당시 중앙여론조사연구소장을 중심으로 모인 일종의 사조직이었다. 별동대 조직원들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를 들락날락했다. 청와대 소속이 아니었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청와대 무적(無籍) 비서관’으로 불렸다. 무적 비서관들에겐 적(籍)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적(敵)도 없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던 청년들은 국정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1997년 무적(無籍) 비서관 한 명이 언론에 포착됐다. 김현철 별동대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정대희 씨였다. 이를 계기로 청와대 무적 비서관 실체가 일부 드러났다. 이후 김현철 씨가 한보사태에 휘말리면서 무적 비서관 중 극소수의 실명이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도 청와대 무적 비서관들의 활동 면면을 속속들이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무적 비서관의 모태는 ‘광화문팀’이다. 광화문팀 탄생은 대선을 앞두고 있던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끗발을 날리던 정치 청년’들이 김현철 휘하로 모였다. 대권 레이스가 시작되면서 조직 규모는 커졌다. 그리고 이들은 공식적인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조직이 커지자 광화문팀은 공식적으로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 청년사업단(단장 김 아무개) 간판을 달고 활동했다. 나사본은 민주산악회와 더불어 YS계열 최대 사조직 중 하나로 손꼽히는 단체였다.
공식명 나사본 청년사업단, 속칭 별동대의 진두지휘는 김현철 소장의 몫이었다. ‘김현철 절친’ 박태중은 조직의 자금운영을 담당했다. 광화문팀 멤버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대학 시절 학생회장 또는 운동권 출신이었던 젊은이들이 주를 이뤘다. 자연스레 구성원 저마다의 개성도 강했다. 당시 광화문팀 요원 중 한 명은 “당시 회의를 하면 누구 하나 꿇리지 않는 언변을 자랑했다.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철학이 있으면서도 소통이 잘됐다”고 기억했다.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 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사진=최준필 기자
초기 광화문팀 ‘기획 파트’는 정 아무개, 김 아무개, 그리고 언론에 노출이 됐던 정대희 씨 등 연·고대 출신 청년들이 담당했다(정 아무개, 김 아무개 씨는 이후 청와대 행정관으로 공식 합류했다). 이들은 광화문팀 별동대의 브레인 역할을 했다.
별동대의 손과 발 역할은 ‘지역 파트’ 소속 요원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지역별 선거운동과 표를 끌어들이기 위한 민원 취합을 도맡았고 여론전을 주도했다. 여기에 합류했던 청년들은 각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던 정치 청년들이었다. 서울 지역 이 아무개, 경기 지역 원 아무개, 인천 김 아무개, 강원·충북·충남·대전 이 아무개, 부산·경남 최 아무개, 대구·경북 김 아무개, 광주·전남·전북 박 아무개 씨가 담당 지역별 별동대 활동을 총괄했다.
개성 강한 정치 청년들을 관리하는 임무는 김 아무개 나사본 청년사업단장의 몫이었다. 김 단장 역시 당시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김 단장은 이후 YS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으며, 지금은 더불어민주당 다선 의원으로 활동하는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김현철 별동대(광화문팀)는 1992년 대선에서 YS 선거운동을 주도하며 전국 각지를 누볐다. YS가 가는 곳마다 별동대가 함께했다. 별동대는 현지 청년들을 동원해 유세현장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선거는 YS의 승리로 끝났고,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별동대 멤버들이 ‘청와대 무적 비서관’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들은 광화문 소재 미진빌딩 사무실을 본부 삼아 자신이 맡은 지역을 순회했다. 그러면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민원을 취합했다. 민원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민원들은 그대로 청와대로 전달됐다.
전직 광화문팀 별동대 소속의 A 씨는 “우리를 통해 청와대로 전달된 민원들은 대부분이 척척 해결됐다. 지방에선 광화문팀이 소원을 이뤄주는 ‘지니’라고 생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했다.
무적 비서관들의 진가는 선거철에 발휘됐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대한민국엔 ‘재보선 광풍’이 몰아쳤는데, 배경은 이랬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을 앞세워 사정 칼날을 휘둘렀다. 그 결과 국회의원들이 의원직을 상실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다. 그 자리를 채우려는 재·보궐 선거가 자주 열린 것이다. 이들은 선거 전략·기획에 특화된 브레인들이었다. 1992년 대선 승리 경험은 그들에게 ‘절대반지’와도 같았다.
광화문팀 출신 B 씨는 “이인제 전 의원의 1995년 경기도지사 경선,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의 광명 재·보궐 선거에도 광화문팀의 손길이 닿았다”고 회고했다. 사진 왼쪽부터 이인제 전 의원,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지금은 정치권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는 광화문팀 출신 B 씨는 “YS 정부 출범 이후 18차례 재·보궐 선거 기획을 맡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B 씨는 “1995년 민주자유당(민자당) 경기도지사 후보를 선출하는 경선에서도 별동대 활약이 있었다. 당시 별동대는 이인제 예비후보를 적극 지원했다. 선거에 긴급 투입된 민주계 이 후보는 임사빈 후보를 내세운 민정계에 밀려 당시 대의원 경선에서 2위권으로 낙선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이 후보의 깜짝 승리였다. 광화문팀 요원들이 이 후보 측으로 파견됐고, 밤을 새워 대의원 선거전을 기획했다. 치열한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고 회고했다.
B 씨는 “국회의원 선거를 여러 차례 치렀지만 경기도지사 대의원 선거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그는 “당시만 해도, 민자당 주류는 민정계였는데, 이 후보의 경선 승리는 ‘당내에서 민주계가 민정계를 앞질렀다’는 정치적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당 내부적으론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경선이었다”고 했다. 당시 대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이인제 후보는 초대 지방선거 경기도지사로 당선됐다. 이후 이 지사는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B 씨 입에선 또 다른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B 씨는 “지금은 바른미래당 대표인 손학규 씨의 정치 입문 이면에도 청와대 무적 비서관들의 손길이 닿았다”고 했다. B 씨는 “1993년 경기 광명 지역구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손 대표가 민자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때도 광화문팀이 투입됐다. 광화문팀 청년들은 선거를 기획하고, 측면에서 손 대표를 지원했다. 손 대표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여의도에 입성해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청와대 무적 비서관이었던 C 씨는 “선거 지원을 나가면 후보자 측이 새파랗게 젊은 광화문팀 요원들에게 선거활동 사무실을 마련해 주거나 편의를 제공했다. 하지만 아무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다. 그런 대통령 아들이 보낸 용병들이 선거를 도와준다는데 마다할 후보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C 씨는 “그렇다고 광화문팀이 ‘소통령’이란 배경을 이용해 선거를 날로 먹는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 재·보궐 선거에 출마했던 정치인들은 젊은 청년들이 기획한 획기적인 선거전략을 보고 엄지를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후보들과는 급이 달랐던 까닭이다. 격이 달랐다고 보면 된다”고 자부했다. 이어지는 C 씨의 말이다.
“20세기 말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화문 팀은 현대 선거전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여론전을 펼칠 능력이 있었다. 광화문팀 요원들이 선거판에 뛰어들면, ‘여론 청취·분석·조성·전파’라는 프로세스가 능수능란하게 진행됐다. 광화문팀은 당시 선거판 여론 장악에 특화된 특공대였다. 선거 승리 전제 조건을 가장 효율적으로 만족시키던 집단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 1990년대 신한국당 고위 당직자로 활동했던 한 정치인은 “1990년대만 해도 주먹구구식 선거 관행이 활개를 쳤다. 이런 환경에서 광화문팀 같은 별동대는 청년 특유의 신선함과 유연함을 발휘해 선거 전략을 세웠다. 변화무쌍했던 이들의 선거 전략은 1990년대 선거판에서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라 불릴 만했다. 선거를 치르는 실력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며 당시 소통령이 이끌던 광화문팀의 활약상을 인정했다.
1997년 4월 국회에서 열린 한보사태 청문회 전경. 사진=연합뉴스
그런 광화문팀 시대도 곧 저물었다. 이들의 활동은 1990년대 중·후반부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 시발점이라 불리는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소통령’ 김현철 씨 입지가 흔들렸던 까닭이다. 권력은 무상했다. 1997년 국회에서 열린 한보사태 청문회에서 여야 의원들은 ‘김현철의 사조직’을 집중 추궁했다. 자연스레 광화문팀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도 무적 비서관들이 속해 있는 광화문팀 실체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빙산의 일각만 대중에게 알려졌을 뿐이다.
광화문팀 요원, 그리고 청와대 무적 비서관이라 불리던 청년들. 그들이 정치권에서 활동한 지 어느덧 30여 년이 흘렀다. 20~30대 청년이었던 무적 비서관들은 “나 때는…”이란 단어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50대 후반 아저씨’가 됐다. 정치권에선 이들에 대해 “비선실세 원조 격” “나라를 주물렀던 개성 강한 청년들”이라는 평가 등이 나온다. 광화문팀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던 청와대 무적 비서관 중 정치권에 남아있는 이는 극소수다.
시대를 풍미했던 광화문팀 요원 대다수가 정치권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A 씨는 “그때 모였던 청년들은 어떤 자리나 정치적 대가를 바라고 광화문팀에서 활동하지 않았다”며 “당시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그 당시 386 청년들은 ‘문민정부를 성공시키고 통일의 주축이 되자’는 애국심과 열정 아래 한데 뭉쳐 정치판에 청춘을 바쳤을 뿐이다. 그저 사명감으로 일을 했다”고 회고했다. 잠시 침묵에 잠겼던 그가 다시 입을 뗐다.
“그러나 그때 쏟아 부었던 청춘, 열정, 애국심은 IMF 사태가 터지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YS와 함께 말이다. 앳된 나이로 전국을 종횡무진 누볐던 청와대 무적 비서관들, 광화문팀은 ‘권력의 심장부’에서 단맛과 쓴맛을 다 봤다. 어떤 이는 문민정부에 들이닥친 위기와 더불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영광의 시절이다. 그 시절은 신기루 같은 추억으로 남았다. 어찌 보면, 참으로 영화 같은 이야기지 않나.”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