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클라우드 해킹 사진·주소록 빼내 협박…“돈 주겠다” 응하면 불리, 대화방 캡처해야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성 착취물과 신상정보를 공유하는 ‘n번방’과 유사한 형태의 성범죄가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A야, 이 사진 학교랑 친구들한테 뿌려줄까?”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온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닉네임은 ‘ㄱ’. 아무렇게나 적은 자음이었다. ㄱ이 보낸 사진에는 속옷 차림의 A 씨가 있었다. 몇 년 전, 체중감량을 하면서 신체 변화를 보기 위해 찍어둔 사진이었다. A 씨는 당황했다. 답장이 늦어지자 곧바로 또 하나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사회생활 계속 하고 싶지? 앞으로 답장은 1분 안에 해라.” ㄱ이 보낸 메시지에는 A 씨의 부모님과 친구들, 교수님의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ㄱ은 “사진이 퍼지는 것을 막고 싶거든 자신이 시키는 대로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말했다. 나체 상태여야 하며 얼굴이 모두 나와야 한다는 조건도 덧붙였다. 구체적인 포즈를 지시했고 몇 시 몇 분까지 영상을 보내지 않으면 가족 등 가까운 주변인에게 먼저 A 씨 사진을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망설이는 A 씨에게 이번에는 여러 명으로부터 동시 다발적으로 카카오톡이 오기 시작했다. “어쭈” “30분 뒤에 너희 엄마 휴대폰 확인해 봐.” 말로만 듣던 n번방의 범죄 형태와 유사했다.
n번방은 아동·청소년·여성의 신상 정보와 성 착취 영상을 공유하기 위해 텔레그램에 개설된 비밀 대화방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1번부터 8번까지 총 8개의 방이 운영됐다. 각 방에서는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 피해 여성들의 신상 정보와 성 착취 영상이 판매됐다. 가해자들은 8개의 방을 통틀어 n번방이라고 불렀다. 숫자를 뜻하는 n은 앞으로도 몇 개의 방이 더 생길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범행 대상은 주로 트위터에서 찾았다. 자신의 신체 일부 사진을 올리는 이른바 ‘일탈 계정’을 운영하는 청소년들이 n번방 운영자들의 먹잇감이 됐다. n번방 운영자들은 청소년들이 올린 사진을 미끼로 ‘부모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해 더 높은 수위의 사진을 요구했다. 실제 성관계를 맺도록 요구하고 이를 영상으로 찍어 유통하는 일도 빈번했다. 한 운영자는 다수의 미성년자를 한 장소에 불러 모은 뒤 성관계 하는 장면을 촬영하도록 요구했다. 운영자 가운데 일부가 2019년 11월 경찰에 검거됐으나 아직까지 실질적 운영자는 잡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생긴 유사 n번방의 특징은 범행 물색 공간이 트위터에서 네이버 등 포털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사진의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연합뉴스
문제는 n번방의 수법을 본뜬 유사 성범죄가 우후죽순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n번방 운영자가 해오던 범행 방식에서 대상과 공간만 달라졌을 뿐이다. 최근 등장한 유사 n번방 범행의 특징은 범행 대상이 일탈 청소년에서 불특정 다수로 변했다는 점이다. 범행 물색 공간도 트위터에서 네이버 클라우드 등 대형 포털사이트로 옮겨왔다. 즉 피해자의 범위가 더욱 확대된 셈이다. A 씨 역시 “협박 받은 사진은 네이버 클라우드에 저장된 것”이라며 “클라우드를 해킹해 사진과 주소록을 빼간 것 같다”고 말했다.
법망을 피해가기 위한 수법은 전보다 진화했다. 또 다른 피해자 B 씨 역시 최근 네이버 클라우드를 해킹당했다. 가해자는 B 씨의 개인 사생활이 담긴 영상을 빌미로 “음란 영상을 찍어 보내라”고 협박했다. 특이한 점은 가해자가 B 씨를 협박하는 동시에 “계약을 맺자. 내가 원하는 포즈로 영상을 찍으면 1000만 원을 주겠다”며 되레 돈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B 씨가 “(돈은) 필요 없다. 사생활 영상만 지워 달라”고 하자 가해자는 “돈도 벌고 네 입장에선 나쁠 게 없다”며 막무가내의 태도를 보였다고 했다. 이 사건은 현재 경기남부청 사이버수사대에서 수사 중이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추후 법적으로 문제가 되었을 때 ‘강압’이 아닌 ‘거래’였다고 주장하기 위해 증거를 만들어 놓는 것”이라고 봤다. 경기여성연합의 반아 활동가는 “현행법을 악용한 변칙수법이다. 협박 증거만 없애면 영상과 사진은 피해자가 직접 찍어 보낸 것이니까 강간도 준강간은 아니고 유포 처벌도 미미한 수준이다. 이런 형태의 성범죄는 직접 상해를 입히거나 성폭력을 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처벌 수위도 낮다. 유사한 형태의 성범죄가 확산되고 있는 만큼 수사 인력 증원과 처벌 수위 강화가 필요한 시점”라고 말했다.
대처 방법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전문가들은 무관심으로 대응하되, 증거는 꾸준히 수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여진 한국사이버성폭력상담센터 국장은 “센터에서는 가해자와 즉각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성폭력 상담 기관의 도움을 받아 수사기관에 의뢰하는 것이 좋다. 간혹 가해자의 요구를 들어준 뒤 괴로운 마음에 대화방을 나오는 피해자도 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눈 날짜와 내용은 캡처해서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여성의 전화 관계자는 “피해자들은 당장 가해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사진이 유포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한다. 실제로 겁을 주기 위해 일부러 가까운 지인에게 사진을 유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주도권을 가해자에게 주지 말고 서서히 가져오는 것이 중요하다. 가해자는 협박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데,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면 상황이 바뀌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상담기관과 접촉하며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 ‘대처가 미흡했다’고 책망하지 않는 것”라고 말했다.
한편 ‘n번방 사건’에 대한 국제 공조 수사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1월 25일 기준으로 참여자가 20만 명을 넘어 청와대의 공식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실제 경찰은 2016년 네덜란드와의 공조 수사를 통해 국내 최대 음란물 공유 사이트인 ‘소라넷’을 폐쇄했다. 2017년부터는 미국과 영국 등 32개국과 함께 다크웹 음란물 사이트를 수사해 2019년 해당 사이트를 폐쇄하고 300여 명을 검거한 바 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