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 직권남용 인정” 대법 판결…일부 대법관 “균등 지원 의무 없다” 주장엔 우려
2016년 10월 10일 도종환 당시 국회 교육문화체육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의 폭로와 그 이틀 뒤인 10월 12일 한국일보 보도로 9437명에 달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명단이 블랙리스트라는 형태로 문화체육관광부에 전달되었음이 드러났다. 어이없게도 정말 맘에 안 드는 짓을 했다 싶으면 마구 집어넣었구나 싶은 구성이었지만, 마냥 비웃고 넘길 수만은 없었던 까닭은 그게 문자 그대로 정권 차원에서 작성한 요주의 인물 목록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백서)가 출간되어 상황이 면밀하게 기록되기도 했고, 일각에서는 리스트에 등재된 이들을 원고로 하는 집단 민사소송이 진행해 국가를 상대로 승소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 집단 민사소송은 현재도 계속해서 피해자들이 참여하여 회차를 이어가고 있다.
#기억하기 싫지만 기억해야 하는 무언가
지난 정권에서 일어난 사건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또한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무언가’다. 2019년 2월 공개된 ‘백서’는 이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각종 사건에 대한 성명서 또는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선언 등에 이름을 올리거나 창작 활동에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관련 문화예술인에 대하여 정부기관이 작성한 명단이다. 정부기관을 비롯하여 공공기관은 블랙리스트를 기초로 하여 각종 문화예술 사업이나 공연 등 창작 행위에 있어서 해당 문화예술인에게 다양한 인권 침해적 불이익을 가했다. (중략) 박근혜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해당 문화예술인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차별했다. 그 목적은 문화예술계를 권력에게 순응하게 함으로써 국민들의 비판 의식을 억압하기 위함이었다.”
내 경우는 일단 2014년 6월 서울시장 선거에서 당시 후보였던 박원순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같은 죄목(?)의 909명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또한 블랙리스트에는 2015년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참여한 문화인, 2014년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 그리고 2012년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등도 포함됐다.
한데 언론에 나온 명단이 전부가 아니다. 개인 단위는 물론 단체들까지도 언론 발표와는 별개로 일찌감치 ‘좌파 성향 단체’ 따위로 구분돼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블랙리스트로 관리되고 있었다. ‘세월오월’을 비롯해 세태 풍자 등을 담은 작품을 발표했다가 지원이나 전시 등에서 배제당하고 취소당한 사례까지 포함하면 그 범위와 수는 가히 어마어마하다.
#만화계가 입은 블랙리스트 피해 사례
만화 쪽은 어떨까.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각종 선언 등에 참여한 만화인의 수가 상당했고, 따라서 9000여 명에 달하는 명단에서도 만화인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만화가 겪은 주요 블랙리스트 피해 사례로 꼽히는 사건이 있으니 우리만화연대의 만화잡지 ‘보고(BOGO)’가 겪었던 유통 방해 및 2015년 연재만화 제작 지원 사업 배제 건이다.
만화잡지 ‘보고’에 대한 유통 방해 및 지원사업 배제로 인해 잡지는 2015년 8월 13호로 휴간했다.
여파는 가혹했다. 예술인복지재단이 주관하는 현장예술인교육지원사업에 우리만화연대 등 블랙리스트에 오른 단체가 선정되자 사업 자체를 폐지하고 예술인 복지기금을 늘리는 형태로 우리만화연대 등을 배제했다. 2015년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에서는 ‘만화 보고(BOGO) 토크 콘서트’ 기획이 배제되었다.
화룡점정은 2015년 연재만화 제작 지원 사업이었다. 우리만화연대는 이 사업에 세월호를 다룬 ‘끈’과 국정원 직원과 북한이 무대로 나오는 ‘명태’,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무대로 하는 미완작으로 많은 독자들이 뒤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광야’를 신청했으나 모두 탈락했다. 조사 결과 탈락 사유가 블랙리스트 등재 단체에서 낸 작품이라는 이유였음이 드러났다. 이들 지원을 엮어 발간을 이으려던 ‘보고’는 결국 동력을 잃고 2015년 8월 13호로 휴간한다.
#대중 통제 욕망, 긴장을 풀면 되살아난다
‘백서’ 출간 1년 가까이 된 지난 2020년 1월 30일, 대법원에서 중요한 판결이 나왔다. 구속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부 장관에게 적용된 직권남용 혐의를 더 엄격하게 따지라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대법원은 예술인과 단체 성향에 따라 지원을 배제하도록 지시한 행위 자체는 직권남용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 외에 문건을 만들고 보고토록 한 행위에 관해서는 피고들이 하급자에게 ‘할 의무가 없는 일을 하게끔 했느냐’라는 직권남용의 조건을 두고 하급심에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일부 무죄 취지 파기환송이라고는 하지만 지원 배제 지시 건에 관해서는 대법원이 직권남용으로 인정하였으니만큼 ‘일단은’ 판단이 정리된 것으로 봐야 할 터다. 아쉽게도 최종 형량이 확정되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게 됐다. 이와는 별개로 다소 우려스러운 반응이 들려온다. 둘씩이나 되는 대법관이 블랙리스트 건에 무죄 취지로 발언했는데, 특히 그 가운데에서 박상옥이라는 대법관이 “모든 문화적 활동을 기계적으로 균등하게 지원해야 할 국가의 의무나 이에 대응하는 개인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문화예술 지원은 비단 ‘국가 지원 사업을 신청’하는 일만이 아니라 심사위원 위촉을 비롯한 다양한 공적 활동과도 직결돼 있는데다 그 자체로 문화예술의 표현 범위에 관해 정권이 내비치는 태도를 보여주는 기준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정상적인 정권이 보여야 할 단 한 가지 입장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인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까지다. 여기엔 공정과 균형이라는 가치가 이미 반영돼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 가치의 실현으로 이어진다.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이던 당시 이 원칙을 명확히 한 바 있다.
박상옥 대법관의 말은 그나마 소수의견에 머물렀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민주적 긴장을 풀면 사회는 저런 발언에 힘이 실리게끔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들이닥칠 피해는 왕년의 동네북인 만화에만 그치지 않을 터다.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