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류 중인 법안과 겹쳐 “총선 앞두고 급하게 재탕”…적절한 양형 기준 마련이 급선무
하지만 법조계는 회의적이다. 20대 국회 통과가 요원하다는 지적이다. 총선을 의식한 뒷북 대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법원 내에서는 ‘입법’보다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고, 이에 맞는 적절한 양형 기준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얘기한다. 법의 사각지대보다는 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들끓는 여론과 이에 편승한 국회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과 관련해 국회 국민청원에는 ‘n번방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는 청원이 3월 24일 다시 등장했다. 조주빈이 검거될 때까지 여야 정치권이 성범죄 관련 입법을 제대로 챙기지 않으니까 비판 여론이 거세지면서 다시 등장한 청원이었다. 텔레그램 등 사이버 성범죄 관련 처벌을 강화하자는 것인데, 청원인은 “불법촬영물을 공유하거나 이를 구매해 보는 행위는 최소 20년에서 최대 무기징역, 사이버성범죄가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SNS나 메신저 단체대화방에 참여하는 행위는 최소 3년형에서 최대 10년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도록 입법해 달라”고 주장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과 관련해 국회 국민청원에는 ‘n번방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는 청원이 3월 24일 다시 등장했다. 텔레그램 등 사이버 성범죄 관련 처벌을 강화하자는 내용으로 청원 하루 만에 10만 명의 지지를 받아 국회 상임위원회 심의에 들어갔다. 사진=국회 국민청원 사이트 캡처
이 주장은 청원 하루 만에 10만 명의 지지를 받아 국회 상임위원회 심의에 들어갔다. 또, 이번 n번방 사건이 벌어진 텔레그램에 가입한 사람들의 신상을 공개해달라는 ‘미성년자 성범죄자 처벌 및 신상공개에 관한 청원’ 역시 3월 31일 오후 1시 20분 기준, 3만 3900여 명의 동의를 받고 있다.
이처럼 n번방 사건 관련 여론이 뜨거워지자 국회의원들도 관련 법안 발의에 나섰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불법촬영물을 이용한 협박 행위를 성범죄로 규정해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입법안을 3월 31일 접수했다. 접수에 앞서 보도자료 등을 통해 이를 알린 박광온 의원은 “그동안 디지털 성범죄에 안일하게 대처해왔던 축적의 결과”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한 디지털 성범죄 처벌법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대출 미래통합당 의원 역시 운영자에 대한 형량을 최대 무기징역까지 높이고, 가입자에 대해서도 형사처벌을 추진하도록 하는 내용 등을 포함한 이른바 ‘n번방 방지 3법’ 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박광온 의원은 입법안에서 ‘촬영 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지 않은 경우에도 사후에 그 촬영물 또는 복제물을 촬영 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반포 등을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한다’고 적어, 유포 자체에 엄한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법안 내용에 대해서는 ‘뻔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새로 발의된 법안 내용들이 대부분 겹친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내놓은 개정안은 △불법촬영물의 다운로드도 처벌 △성적 불법 촬영물로 협박 시 특수협박죄 및 강요죄로 처벌 △본인이 찍은 촬영물이 의사에 반해 유포 시 처벌 가능 등이 주요 내용인데, 이 역시 박광온·박대출 의원 안과 유사하다.
n번방 사건 관련 여론이 뜨거워지자 국회의원들도 관련 법안 발의에 나섰다. 그렇지만 법안 내용에 대해서는 ‘뻔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게다가 새로 발의된 법안 내용들이 대부분 겹친다. 사진=박은숙 기자
재탕 법안들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현재 국회 계류 중인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에는 이미 처벌 강화와 서비스 사업자 책임 부과 내용이 담겨 있다. 진선미·유승희 민주당 의원안, 윤소하 정의당 의원안 등이 대표적인데 ‘소라넷’과 ‘웹하드 카르텔’ 사건 때 발의된 안들이다. 이미 계류된 것들조차 처리하지 않았던 만큼 앞다퉈 이뤄지는 새 법안 발의는 ‘총선을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한 판사는 “원래 처벌이 약하다는 얘기는 전부터 있었다”며 “최근 입법안이 나온다는 기사를 봤지만 총선을 앞두고 여성 표심 공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따로 찾아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20대 국회는 이제 총선 국면에 접어들어 이를 처리하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정의당은 총선 전 이를 처리하기 위한 국회 본회의를 열자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보름 앞으로 다가온 총선 일정에 정치권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법조계는 ‘양형안’으로 이를 바로 잡는 것이 우선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법의 사각지대보다는 약한 처벌이 문제였다는 설명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미성년자 사건의 경우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등으로 불법 촬영이나 불법 유포 등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고 5년 이상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며 “결국 기존에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로 끝났던 처벌 기준을 높이는 게 중요하지 않겠냐”고 설명했다.
특히 성인 관련 사진 및 동영상 불법 유포의 경우 그 처벌은 더욱 약했다. 백광균 판사가 디지털 성범죄, 특히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의 처벌과 양형에 대하여 발표한 자료(대법원 양형위원회, ‘디지털 성범죄와 양형’, 양형연구회 심포지엄)에 따르면 2018년 1월부터 2019년 4월까지 서울중앙지법이 선고한 164건의 디지털 성범죄 사건에서 실형을 받은 비율은 10%밖에 안 됐다. 반면, 집행유예는 41%, 벌금형은 46%였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불법 촬영 및 유포에 대해 최대 5년(영리의 경우 최대 7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돼 있지만 처벌이 약했다는 얘기다.
이에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현재 1심 판사들을 대상으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 11조에 대해 적절한 양형이 얼마인지 물은 설문조사 통계를 분석 중이다. 그 결과를 4월 20일 양형위 회의에서 다룰 예정인데, 이때 논의된 양형기준은 올해 하반기부터 적용된다. 그동안 양형기준 없이 재판부마다 각기 이뤄졌던 양형이 전반적으로 상향조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대목이기도 하다.
#“수사 어려운 점도 감안해야”
검찰도 이 같은 양형 강화 및 입법 움직임에 대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신중한 접근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단순 호기심에 가입하거나, 가입은 했으나 보지 않았을 경우 등 구체적인 과정을 모두 감안하지 않은 ‘단순 양형 강화 입법안’은 성급하다는 지적이다.
수사 과정에서 ‘다운로드를 받았거나, 시청했음을 입증하는 과정이 너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경찰 관계자는 “디지털 성범죄에 있어 가장 힘든 수사 과정은 피의자가 휴대전화를 버렸거나 교체했을 때 불법 영상물 소지 과정을 어떻게 입증하겠냐는 것”이라며 “유포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제3자 등의 자료를 통해 입증이 비교적 쉽지만, 단순 소지자를 찾아가는 과정은 또 다른 차원의 수사가 된다”고 설명했다.
앞선 판사도 “이번 사건을 놓고 국민적 분노가 엄청나지만 수사 과정에서 증거를 찾아내 ‘불법 촬영, 유포물을 시청했음’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유료로 가입한 사람들도 문제가 있지만, 운영진에 대한 엄벌이 우선 아니겠냐”고 의견을 밝혔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