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비메모리’, 현대차 ‘모빌리티’, SK ‘ICT’ 중심 체질 개선…LG ‘선택과 집중’, 롯데 ‘온라인 플랫폼’ 앞날 주목
새 총수들은 의사결정 및 인사권을 장악하고 그룹 ‘방향키’를 강하게 쥐었다. 당장 돈이 되더라도 비핵심 사업이라는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정리하면서 새 사업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선대 총수들이 패스트 팔로어 전략(Fast Follower)으로 기업을 이끌었다면, 현재의 총수들은 변화와 혁신을 통해 퍼스트 무버(First Mover)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은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고 ‘판’이 바뀌는 4차 산업 혁명에 대응해야 한다. 일요신문이 창간 28주년을 맞아 패러다임의 변화 속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준비하는 5대그룹의 전략을 분석했다.
#“비메모리가 미래 성장동력” 삼성
삼성의 최대 무기는 메모리 반도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2014년 이건희 삼성 회장 투병 이후 경영 일선에 나선 이후 메모리 반도체 육성 전략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메모리 반도체는 가격 변동이 심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또 메모리는 전체 반도체 시장 규모의 30%에 불과하다. 70%에 달하는 비메모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존재감은 극히 낮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박정훈 기자
변화는 2019년 1월 시작됐다.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비메모리 반도체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의 새 총수 입에서 비메모리가 ‘미래 성장동력’이라고 언급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3개월 뒤인 2019년 4월 삼성전자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로, 133조 원 투자를 공식화했다. 연구개발에 73조 원, 생산 시설에 60조 원을 계획하는 등 철저히 미래에 초점이 맞춰졌다. 오너가 아니면 결정할 수 없는 공격적인 투자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비메모리 시장은 크게 PC 등 CPU,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이미지 센서 시장으로 나눠져 있다. 각각 미국의 인텔, 퀄컴, 일본의 소니가 장악하고 있는데 전체를 이끄는 기업은 없다. 이재용 부회장의 비메모리 육성 전략에는 파이가 작은 메모리 시장 선두를 넘어 실질적인 반도체 시장 1위 달성이라는 의지가 담겨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2019년 시설투자에서 반도체 분야에만 22조 원을 쏟아 부었다. 메모리 분야 투자는 전년보다 줄었고, 비메모리 부문은 설비 증설 등으로 투자가 늘었다는 것이 삼성전자 관계자의 설명이다. 올해 투자 역시 비슷한 흐름으로 단행될 것으로 관측된다.
2020 정기임원 인사에선 비메모리 반도체의 한 축인 파운드리 사업부에서 두 명의 부사장 승진자가 나왔다. 비모메리 기술과 양산 규모 확대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평가다. 그 밖에 이 부회장은 AI(인공지능), 5G, 바이오, 전장 분야도 집중 육성 중이다. 바이오를 제외한 나머지 세 분야는 반도체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종합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 전환’ 현대차그룹
현대자동차그룹은 전형적인 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내세워 기업 몸집이 키웠다. 자연스럽게 독창성이나 급변하는 자동차 산업 구조 전환에 대응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꾸준히 받아왔다. 그런데 최근 현대차그룹은 독자적인 색을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이어 3세인 정의선 총괄 수석부회장이 실질적으로 현대차의 미래를 짊어지기 시작한 후부터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 부회장. 사진=공동취재단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미래 모빌리티 시장의 ‘게임체인저’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현대차그룹을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사업 목적에 모빌리티 등 기타 이동수단을 추가하고 사업 목적을 ‘각종 차량 및 기타 이동수단과 동 부분품의 제조판매업’으로 변경하면서 올해부터 전환 작업을 본격화하기로 했다. 단순한 자동차 제조 회사가 아닌 ‘미래 이동수단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이다. 앞서의 사업 목적 변경 과정에서 특정 이동수단을 정하지 않고 ’기타 이동수단’으로 적시한 이유다.
앞서 정 수석부회장은 스마트모빌리티 사업 확장을 위해 2025년까지 61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차량 전동화(친환경 자동차) △스마트카(자율주행·커넥티드카) △로봇·인공지능(AI) △미래 에너지 △스타트업(신생벤처기업) 육성 등을 5대 미래 혁신성장 분야로 선정했다. 이 가운데 전기차, 모빌리티, 자율주행 등 미래기술 분야에 전체 투자금 중 3분의 1가량인 20조 원이 투입된다. 현재의 자동차 시장은 물론 미래 모빌리티 사업 모두 잡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최근엔 싱가포르에 ‘현대 모빌리티 글로벌 혁신 센터’ 건립을 공식화했다. 오는 5월 착공하는 이 센터는 일종의 ‘실험실’이다. 현대차그룹은 이곳을 R&D(연구·개발)부터 비즈니스, 제조에 이르는 미래 모빌리티 가치사슬 전반을 혁신할 새로운 사업과 기술을 개발하고 검증하는 곳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2018년 2월 출범한 그룹 전략기술본부 산하 조직으로, 정 수석부회장이 공을 들여 만든 기존 개방형혁신센터보다 한 단계 더 확장된 개념의 시설이 될 것으로 현대차그룹은 기대하고 있다.
#재계 2위 넘보는 ‘행복’ SK그룹
재계에선 SK그룹이 조만간 현대차그룹을 제치고 국내 대기업 서열 2위로 올라설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이 최근 3년 동안 자산 규모가 5조 원 늘어난 데 그친 반면, SK그룹은 매년 10조 원 이상 증가했고 2019년엔 전년에 비해 30조 원 가까이 불어났다. 이 추세대로면 SK그룹의 올해 자산 규모는 234조 원, 현대차그룹은 230조 원에 그치면서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공동취재단
1998년 총수 자리에 오른 최태원 SK 회장은 5대그룹 총수 가운데 가장 먼저 경영 일선에 나섰다. SK그룹은 3차례의 ‘퀀텀점프’로 몸집을 크게 불렸는데, 1980년 유공(현 SK이노베이션), 1994년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에 이어 2012년 하이닉스(SK하이닉스) 인수 결단을 내렸다. 당시 우려와 논란이 많았지만 현재는 2000년대 이후 SK그룹의 ‘빅딜’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거래로 평가 받고 있다.
최 회장은 최근 ‘딥체인지(근본적 변화)’를 강조하며 그룹의 체질 개선을 직접 주도하고 있다. 딥체인지는 1998년 회장 취임 당시 내세웠던 경영 기조지만, 기존 내수 중심의 에너지 화학 사업을 개선하고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를 통해 5G 등 4차 산업혁명에 맞춘 혁신을 추진 중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조직 개편과 인사, 계열사 사명 변경 등 숨 가쁘게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최태원 회장의 혁신은 기술뿐만 아니라 기업 문화에서도 추진되고 있다. 그는 사업 모델 변화와 함께 일하는 방식과 인재 육성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그룹 경영의 핵심 화두를 ‘행복 경영’으로 정한 이후 그룹 구성원과 관련 내용을 꾸준히 공유하고 있다. 지난 3월 정기주주총회에선 ‘구성원의 행복 추구’를 정관에 담는 안건이 올랐고 통과됐다. 기존 ‘회사는 급변하는 환경 하에서 생존을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진화, 발전하여 주주의 장기적 이익을 보존해야 한다’는 내용을 지우고 ‘경영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성원의 행복이며, 이해 관계자의 행복도 함께 키워나감으로써 지속적인 행복을 추구한다’는 문구를 추가했다.
#재계 ‘선택과 집중’의 아이콘 LG그룹
4세 경영인인 구광모 LG 회장은 5대그룹 총수 가운데 ‘선택과 집중’ 전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LG그룹은 구 회장 체재가 시작된 2018년 말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비핵심 사업 정리와 투자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LG화학의 LCD소재사업부문, LG유플러스의 전자결제(PG), LG전자의 연료전지 자회사 LG퓨얼시스템즈 청산 및 수처리 사업부 등을 모두 매각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지난 3월 말엔 LG화학이 핵심 사업으로 추진 중인 전기차와 관련된 자회사 우지막코리아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사는 LG화학이 2018년 9월 230억 원을 투자해 인수한 회사로, 1년 6개월 만에 다시 시장에 매물로 내놨다. 영업적자가 이어지고 있고 사업성도 낮다는 판단에 따른 결정으로 해석된다. 재계에선 ‘투자 실패’라는 지적이 지배적이지만 동시에 현재 LG그룹의 ‘선택과 집중’ 경영 기조가 그대로 묻어난 결정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구광모 회장은 최근까지 새로운 캐시카우나 신사업 등을 구체화하지 않고 있다. LG전자와 LG화학이 각각 모빌리티 분야와 배터리, 자동차 소재 중심으로 미래 청사진을 밝히고, 지주사 (주)LG가 LG유플러스의 지분율을 늘리면서 통신 사업에 힘을 주고 있지만 재계에선 추가 신사업 발굴 또는 육성이 단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LG그룹이 지난해까지 사업 재편과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면서 쌓아둔 ‘실탄’이 조만간 인수합병 또는 연구개발, 투자 등에 사용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향후 LG그룹에서 투자가 단행된다면 계열사보다는 지주사 차원에서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전환(DX,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구 회장의 사업 재편의 핵심이다. DX는 기업 전략, 조직, 사업 전반을 디지털 중심으로 변화시키는 경영전략으로 세계 유명 기업들 사이에선 ‘트렌드’다. AI와 빅데이터, IoT(사물인터넷)을 활용해 기존 사업구조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것이 핵심이다. LG그룹 계열사들은 현재 코로나19 여파로 상반기 대졸 신규 채용은 미뤘지만 AI, 빅데이터 관련 경력 채용은 추진하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 인력 확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 계열사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답변이다.
#“지속성장 가능한 온라인 플랫폼 만들라” 특명 받은 롯데그룹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5대그룹 가운데 가장 변화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총수로 꼽힌다. 최근 수년 사이 잇따라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3조 원을 넘어섰던 당기순이익은 2018년 20년 전 수준인 5500억 원대로 쪼그라들었다. 핵심 사업인 유통, 식품 사업이 맥을 못 추면서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사진=최준필 기자
롯데그룹은 그동안 몸집불리기에 초점을 맞췄다.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 사업 특성상 몸집이 곧 매출과 수익으로 이어졌다. 다만 새로운 투자나 사업 발굴에는 다소 보수적으로 접근했다. 사실상 한 우물만 판 셈이다. 유통업계는 온라인으로 전환된 지 오래다. 과거 형제의 난과 사드 보복, 일본 불매운동으로 롯데그룹이 직격탄을 맞았지만 ‘유통 사업 패러다임’ 전환과 ‘과거의 영광’에 젖어 대응이 늦었다는 점이 현재 그룹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신 회장은 2013년부터 ‘옴니(Omni)채널’을 강조하면서 온-오프라인 유통 플랫폼 일원화를 추진해왔지만 현재는 사실상 실패한 전략으로 통한다. 계열사별로 고객이 분산됐고 결국 이커머스에 구매고객을 내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롯데그룹은 다시 최근 2년간 이커머스 사업 강화를 위해 약 3조 원을 투자했다. 앞서 롯데닷컴을 롯데쇼핑이 흡수·합병한 것도 이 작업의 일환이다. 계열사별로 흩어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합해 ‘롯데ON’ 출범을 앞두고 있다. 2년 내 온라인 매출을 20조 원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도 공식화했다. 현재 매출 규모의 3배를 넘는다.
신 회장은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사장단 회의 등에서 “지금의 이커머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라”는 취지의 주문을 여러 차례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커머스는 매출은 높지만 수익성이 낮다. 거의 모든 이커머스 업체들이 적자를 내고 있다. 롯데그룹이 지금의 온라인 유통 트렌드를 후발주자 입장으로 따라가기보다 온-오프라인을 통합해 지속적으로 성장 가능한 ‘롯데만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신 회장의 판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코로나19는 5대그룹 총수들의 새로운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은 시장 예상과 달리 올해 1분기 ‘선방’한 실적을 냈지만, 유럽과 미국 등에서 감염병이 뒤늦게, 그리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 2분기에는 실적 악화가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재 5대그룹은 각각 비상경영체제로 전환하거나 올해 초 세워둔 경영계획 전반을 재검토하고 있다. 갑작스런 변수인데다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라 각 총수들의 위기관리 능력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향후 받아든 성적표에 따라 총수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올 것이란 것이 재계의 전망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