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개선-주주 친화 정책-외부 공세 리스크 해소…2년 전과 상황 달라 세부 내용 조정될 수도
현대차그룹은 2018년 3월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놨다. 그룹 안팎으로 꾸준히 지적받던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경영권 승계까지 이뤄내는 일석이조의 방식이었다. 현재 그룹 지배구조는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진다. 현대모비스 일부 사업부문을 분할해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현대글로비스(지분 23.3%)와 합병하는 것이 개편안의 골자다. 이 경우 ‘대주주→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글로비스·현대제철(대주주→현대모비스→완성차→개별 사업군)’으로 단순해진다.
국내 대기업 순환출자 구조 해소를 요구해왔던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이 방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이 이 작업에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외국인 주주들도 잇따라 반대 의견을 냈고, 국내 주주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결국 현대차그룹은 개편 작업을 잠정 중단했다.
2018년 5월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안 철회를 선언하면서 경영 실적이 회복되고 주가가 일정 수준까지 올라올 경우 개편 작업을 재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의선 수석부회장도 당시 “주주와 시장의 충분한 신뢰와 지지를 얻은 후에 다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현대차그룹이 올해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사진=최준필 기자
최근 증권가와 완성차 업계에선 현대차를 두고 “올해가 정 수석부회장이 약속한 그때”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실적과 시장 및 그룹 안팎의 상황을 볼 때 개편 작업을 다시 추진할 여건이 갖춰졌고, 현대차 역시 전략적으로 이를 준비해 왔다는 평가다.
지난해 현대차는 어닝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2018년과 비교해 50% 늘었고, 사상 처음으로 매출 100조 원을 돌파했다. 기아차 역시 3년 만에 영업이익 2조 원대를 회복했고 매출 58조 원을 올렸다. 현대모비스 매출 38조 원까지 더하면 3사 매출액은 200조 원에 육박한다.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였다. 증권사들은 최근 2019년 실적 발표 직후 잇따라 상향 조정하고 매수 의견을 내고 있다.
지난해 실적은 2018년 9월 출범한 ‘정의선 체제’의 첫 성적표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원화 약세와 SUV 차량 판매 증가 등이 실적 개선의 주요 배경”이라면서 “정 수석부회장 체제로 접어든 지 1년 만에 어닝서프라이즈 수준의 결과물이 나온 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이 전사적으로 밀어붙이는 주주 친화 정책에도 시장의 관심이 높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10월 주요 계열사들의 IR 조직을 사장 직속으로 격상시켰다. 과거 회장-수석부회장-사장-재경본부-IR로 이어지던 조직을 회장-수석부회장-사장-IR로 줄였다. IR 조직은 주주 및 투자자들과 직접 소통한다. 정 수석부회장 등 최고경영진이 주주 및 투자자들과의 소통을 사실상 직접 챙기는 형태로 바뀐 셈이다. 이후 현대차그룹 각 계열사 IR 조직은 활동 폭을 확대하고 주주 및 기관투자가와의 접촉을 크게 늘린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에는 기존 3개 계열사만 선제적으로 도입했던 전자투표제를 나머지 9개 상장 계열사들로 확대했다. 전자투표제는 기업이 전자투표시스템에 주주 명부와 주주총회 안건을 등록하면 주주들이 주총장에 가지 않아도 인터넷 전자투표를 통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주주 친화 정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동시에 현대차그룹은 현대트랜시스와 현대엔지니어링 등 비상장사에도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비상장사 사외이사 선임은 법적 의무가 없다. 현대차그룹에선 첫 시도고, 재계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거의 없다. 다만 트랜시스와 엔지니어링은 각각 현대차와 현대글로비스, 정 수석부회장 등이 주요 주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향후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나 모비스 등 핵심 계열사뿐만 아니라 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일제히,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단순 주주 친화 정책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고 해석했다.
외부 공세 리스크도 해소됐다. 지배구조 개편안에 반대 의견을 냈던 엘리엇은 최근 현대차그룹 지분을 모두 매각하고 완전히 철수했다. 엘리엇은 현대차 지분 2.9%, 현대모비스 2.6%, 기아차 2.1%를 보유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지만, 지난해 말 폐쇄된 주주명부에서 엘리엇의 이름이 삭제된 것으로 확인됐다.
증권업계에선 엘리엇이 지난해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주주 배당 8조 원으로 확대 및 사외이사 추천 의견을 냈다가 패배한 뒤 영향력이 약해지자, 2019년 실적 발표 전후 주가 상승을 계기로 손실이 다소 줄어들면서 철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엘리엇은 2018년 15만~16만 원 선에 현대차그룹 지분을 샀다. 현재 현대차 그룹 주가는 13만 원 선이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이 지난 2019년 10월 15일 열린 미래차산업 국가비전 선포식에서 ‘현대차그룹 미래차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현대차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점도 지배구조 개편 재개설에 힘을 싣고 있다. 지난 2월 19일 현대차는 오는 3월 사내이사 임기가 끝나는 정 회장을 대신해 현대차 재경본부장(CFO)인 김상현 전무를 새 사내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3월 19일 정기 주총에 상정한다고 밝혔다.
정몽구 회장은 이사회 의장도 맡고 있었다. 정 수석부회장이 이사회 의장을 물려받아 현대차, 현대모비스 등 그룹 핵심계열사 대표이사와 겸직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반대로 다른 이사 가운데 한 명이 맡게 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이사회 의장을 누가 맡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며 “의사결정을 하는 최상위 기구인 이사회에서 정 회장이 물러났다는 것 자체가 공식적인 ‘세대교체’를 의미한다. 정 수석부회장이 의장을 맡은 안 맡든 그룹 내에서 지금보다 더욱 확실한 지위를 가지게 되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은 2018년에 제시했던 안과 큰 틀에서 변화는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현대차그룹은 ‘정의선 체제’ 출범 이후 ‘자동차 제조 회사’에서 ‘이동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는 회사’로 전환 중이다. 개편안대로 추진되면 이 작업에도 큰 힘이 실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다만 2년 전과 비교해 기업 가치가 다소 달라졌고, 당시 주주들의 반발도 있었던 만큼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 합병 비율 등 세부 내용은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에서 ‘시장 친화적 방향’을 강조하고 있어, 현대모비스 분할부문을 상장해 공정가치를 평가받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과거 여러 차례 언급됐던 지주사 설립 가능성은 높지 않다. 지주사를 설립하게 되면 현대차그룹은 금산분리 원칙으로 인해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등 금융 계열사를 정리해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말을 아끼고 있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관계자는 각각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현재로선 정해진 바 없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