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기록지 전산화, 17년 걸려 1만 6000건 수정…정민철 완투 한개 추가, 이강철 탈삼진 2개 추가
코로나19 여파로 연기된 KBO 리그 개막을 팬들이 기다리고 있는 시점, KBO는 의미있는 발표를 했다. 사진=연합뉴스
매 경기 KBO 기록위원이 작성하는 공식 기록지에는 투수의 공 하나가 던져질 때마다 야구장에서 펼쳐지는 상황이 모두 담긴다. 투수가 공을 던졌을 때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는지, 볼이었는지, 인플레이 타구가 됐는지는 물론이고 헛스윙이었는지, 파울인지, 혹은 아웃이 됐어야 할 파울 타구를 야수가 잡지 못해 타석이 이어졌는지까지 상세히 표기된다.
1점이 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한 팀이 2사 2루에서 적시타로 점수를 뽑았을 때 기록지에는 어느 타자가 어떤 안타로 타점을 올리고 어느 주자가 홈을 밟아 득점을 올렸는지만 적는 게 아니다. 앞서 두 개의 아웃카운트는 어떻게 올라갔고, 주자는 어느 시점에 어떻게 루상에 나가 2루까지 밟았으며, 그 과정에서 양 팀이 공격과 수비에서 어떤 플레이를 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적는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2019시즌까지, 38년간 열린 수많은 게임의 기록지가 지금까지 모두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 왔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매일같이 전 경기를 TV로 중계하지 못했다. 야구 인기나 팬들의 열기는 지금 못지않게 높았던 시절이지만, 프로야구 TV 중계는 주말이나 공휴일에 지상파에서 어쩌다 한 번 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여겨졌다. 따라서 야구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직접 야구장을 찾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지 못한 팬들은 집에서 라디오 볼륨을 높여 가며 ‘귀로 듣는 야구’와 해설가의 입담에 만족해야 했고, 혹은 그날 밤 TV 스포츠뉴스나 다음날 아침 스포츠신문을 통해 경기 결과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니 영상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과거 프로야구 경기의 숨은 순간들을 복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경기의 기록지를 탐구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공식 기록지에 새겨진 선수들의 이름들, 안타를 상징하는 줄 하나하나와 아웃을 표기한 로마숫자들, 야수들의 수비 위치를 표시한 숫자 하나하나 모두 값진 발자취로 남아 40년 가까운 KBO 리그의 역사를 쌓아 올렸다.
#KBO는 왜, 어떻게 15년의 기록을 복원했나
KBO는 지난 2일 ‘1982~1996년 6168경기 기록 검증 및 데이터화 최종 완료’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코로나19 확산 사태로 팀간 연습경기조차 열리지 못하고, 언제 시즌을 개막하느냐에만 초점을 맞췄던 시국. 많은 야구팬들에게는 그저 쏟아지는 야구계 소식들 가운데 하나로만 여겨졌을 수 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KBO리그 첫 15시즌의 기록 데이터화 작업은 오랜 시간 KBO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국내 최대 규모와 최고 인기를 자랑하는 프로야구는 공식 통계업체 스포츠투아이와 손잡고 방대한 분량의 성적과 기록을 제공하고 있다. KBO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선수 이름을 검색창에 적어 넣고 엔터키를 누르기만 해도 최근 성적부터 통산 성적, 상대 투수별 성적과 상황별 성적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러나 KBO가 야구 기록을 경기장에서 곧바로 온라인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리그 역사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2001년부터였다.
경기 공식 기록원이 ‘뷰어’라는 전산 기록지에 경기 내용을 입력하면, 이 기록이 스포츠투아이로 곧바로 전송돼 디지털 형식으로 저장되는 형식이 그해 처음 도입됐다. 경기 상황의 실시간 문자중계가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수기 기록지와 온라인 기록지의 비교 작업까지 진행할 수 있게 돼 기록의 정확성도 확보됐다.
하지만 2000년까지만 해도 모든 작업은 수기로 이뤄졌다. 기록원이 ‘넷텀’이라는 전산 프로그램에 경기 기록을 입력한 뒤 KBO가 이 내용을 종이에 일일이 출력해 월 단위로 제본하고 서고에 차곡차곡 보관하는 식으로 기록을 관리했다. 심지어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전산 입력 자료조차 없이 아예 기록원이 경기 중에 작성하는 기록지를 그대로 제본해 보관하는 수준이었다.
과거 야구 경기의 기록이 필요할 때면, 서고에 들어가 해당 시즌과 해당 경기 기록지를 일일이 뒤진 뒤 계산기로 집계해야 했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모든 작업을 손으로 한 터라 그동안 집계된 기록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오류가 생겼을 수 있다는 게 늘 고민거리였다.
그 어느 종목보다 기록의 가치에 무게를 두는 KBO 관계자들은 “프로야구 초창기 기록도 모두 전산으로 입력해 언제든 정확한 통산 기록과 통계를 낼 수 있도록 작업해놓아야 한다”는 숙제를 늘 마음에 품고 살았다. 결국 스포츠투아이가 전산화되지 않은 시즌 가운데 가장 최근의 4년(1997~2000년)까지의 기록을 먼저 데이터베이스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KBO도 2004년부터 이전 15시즌(1982~1996년)의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끝이 어딘지 모를 작업이었다. 1년도 아닌 한 달 치 경기 기록과 팀 순위, 선수 개인 순위 등을 제본해 놓은 B4 크기 파일의 높이가 웬만한 스마트폰을 세로로 세워 놓은 높이와 맞먹을 정도. 혼자 들고 이동하기도 쉽지 않은 무게다. 그러나 언젠가,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야구 기록’에 대한 애착이 담당자들을 움직였다.
일단 기록위원회 위원들이 1982년 4월 프로야구 개막전을 시작으로 실제 경기를 기록하듯 매 경기 1회초 원아웃부터 9회말 3아웃까지 내용을 차곡차곡 전산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15년간 열린 경기 수만 6168게임. 이어 KBO 홍보팀 전 직원과 스포츠투아이 담당직원들이 이 자료를 받아 본 기록지와 비교하며 다시 한 번 검수하고 이전에 기록됐던 내용들의 오류를 잡아내는 작업을 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기록원의 오기로 잘못 집계된 기록이 1만 6000여 건 발생했다. 무명 선수의 대수비 혹은 대주자 출전이 출장 경기 수에 포함되지 않거나 경기 후반 대체 출장한 선수의 기록이 박스 스코어에는 선발 출장한 선수의 기록으로 잘못 표기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물론 내로라하는 레전드 스타나 유명 선수들의 기록도 오류로 소폭 조정되는 사례가 나왔다. 반대로 홈런 기록 오류는 단 한 개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KBO 관계자는 “데이터베이스화를 하더라도 기록 자체가 틀리면 작업의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안타 하나, 삼진 하나도 틀리지 않은, 정확한 공식 기록을 갖추기 위해 애를 썼다”고 했다.
그 세월이 무려 17년이나 걸렸다. 처음에는 각자 맡은 업무를 해나가는 가운데 틈을 내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에 참여했지만, KBO 리그 40주년인 2021시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작업에 속도를 붙였다. “최소한 우리 프로야구 역사가 40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전 경기 기록 데이터화를 완료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데 뜻을 모은 덕분이다.
KBO 관계자는 “이런 작업을 40주년에 임박해서 해내려면 너무 촉박할 것 같아 ‘무조건 올해 개막 전에 끝내자’고 서로 약속했는데, 무사히 끝마쳐 뿌듯하다”며 “제발 각 부문 통산 1위와 2위가 바뀌는 일만 없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2022년에는 출범 40주년을 기념하는 기록 대백과사전을 출간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역 시절 리그를 대표하는 ‘대도’로 이름을 날린 전준호 현 NC 코치는 이번 기록 복원으로 자신의 기록이 줄며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적잖은 오류가 바로잡히면서 예기치 않은 수혜자와 피해자도 나왔다. 가장 대표적인 피해자는 원조 ‘대도’인 전준호 NC 다이노스 코치다. 현역 시절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뛰면서 독보적인 도루 능력을 자랑했던 전 코치는 그동안 도루 550개를 해낸 프로야구 통산 최다 도루 기록 보유자로 남아 있었다. 2009년 현역 통산 550번째 도루를 해낸 뒤 은퇴해 역대 유일한 ‘550도루’의 주인공으로 기록됐다. 지난해 말 KT 위즈에서 은퇴한 ‘대도 후계자’ 이대형이 늘 ‘꿈의 목표’로 삼았던 숫자기도 하다. 그러나 검증 과정에서 하필이면 도루 숫자가 하나 늘어난 오류가 발견돼 은퇴 11년 만에 통산 도루 수가 549개로 수정됐다.
롯데 소속이던 1996년 9월 20일 광주 무등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 경기에서 도루 한 개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지만, 기록지 검수 결과 연장 10회 교체 출장한 박종일이 2루 도루에 성공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기록을 맡은 담당자가 경기 상황에는 박종일의 도루로 바르게 표시했지만, 경기 후 최종 성적을 집계해 박스스코어를 표기하는 과정에서 전준호의 이름 옆 칸에 도루를 체크해 벌어진 일이었다.
KBO 관계자는 “집계가 끝난 뒤 가장 미안한 분이 전 코치님이었다. 통산 550개를 완성하고 은퇴했는데, 11년 만에 하나가 취소되면서 하필이면 마지막 ‘0’단위 숫자가 바뀌어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며 “도루 하나가 빠지게 된 뒤부터는 ‘전 코치님의 도루가 다른 선수에게 잘못 넘어간 게 없을까, 제발 나와서 다시 550개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한참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오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KBO는 기록 정정 발표 전 NC 구단을 통해 전 코치에게 미리 연락해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다행히 전 코치는 ‘대인배’의 마음으로 “기록이 정정됐다니 오히려 좋은 일이다. 언젠가 그 기록을 깨는 후배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받아 들였다.
반면 현역 시절 통산 100승을 넘긴 레전드 투수 3명은 기분 좋은 ‘기록 보너스’를 얻었다. 현역 시절 ‘이닝 이터’와 ‘완투 머신’으로 활약했던 정민철 한화 이글스 단장은 개인 통산 완투 수가 하나 더 늘어났다. 한화의 전신 빙그레 소속이자 신인 시절이던 1992년 7월 30일 대전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연장 11회를 완투(무승부)하고도 당시 성적 집계 오류로 누락돼 시즌 완투 11회가 10회로 잘못 계산된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동시에 정 단장의 통산 완투 기록은 60경기에서 61경기로 늘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 단장은 “이런 일이 없었다면 평생 60완투로만 알고 살았을 것이다. 역시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는 점을 다시 상기했다”며 직접 KBO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는 후문이다.
이강철 KT 감독은 기록지 오류로 해태 소속이던 1989년과 1992년 탈삼진이 하나씩 누락된 점이 확인됐다. 탈삼진 2개가 추가돼 개인 통산 탈삼진 수가 1749개에서 1751개로 늘었다. 또 1995년 9월 3일 태평양과 인천 더블헤더 1차전 자책점이 3점에서 2점으로 낮아지면서 그해 시즌 평균 자책점 역시 3.30에서 3.24로 내려갔다. 기록 수정이 발표된 당일 수원 KT 위즈파크에서 취재진을 만난 이 감독은 “은퇴한 지 오래돼 탈삼진 기록이 몇 개인지도 기억이 잘 안 난다”면서도 “기록이 깎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 2개지만, ‘49’보다 ‘51’이 나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고 농담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한용덕 한화 감독 역시 빙그레 소속이던 1989~1991년 3년 동안 매 시즌 기록지 오류로 삼진이 1개씩 누락된 점이 확인돼 통산 탈삼진이 1341개에서 1344개로 늘었다. 한 감독은 “승리 수나 이닝 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탈삼진 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본인도 잊고 있던 기록을 찾아주셨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며 “이렇게 지나간 기록을 찾아준 것은 지금 야구하고 있는 선수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투수들의 기록 가운데 가장 많이 수정된 부문은 평균자책점이다. 투구 이닝을 잘못 표시했거나 자책점을 잘못 계산한 탓에 평균자책점이 소폭 조정된 투수들이 적잖이 나왔다. 1983년 시즌 30승을 올린 삼미 슈퍼스타즈 장명부는 시즌 자책점이 111점에서 112점으로 올라 평균자책점도 2.34에서 2.36으로 바뀌었다.
최종 수정된 기록들 가운데는 유명 선수의 것보다 그렇지 않은 선수의 것들이 훨씬 많이 포함됐다. 그러나 17년에 걸쳐 15시즌의 기록을 복원한 이번 작업은 오히려 그런 이유로 더 가치가 있다. 안타 하나, 도루 하나, 탈삼진 하나, 출전 경기 수 하나가 잠시 프로 무대를 밟았던 누군가에게는 그 어느 순간보다 소중한 기억이자 발자취일 수 있어서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무명 선수의 작은 플레이 하나조차 꼼꼼하게 살피고,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해 ‘바로잡았다’는 점 자체가 이번 작업의 진정한 의의이자 쾌거다.
KBO 관계자는 “야구는 기록 위에 역사를 쌓아 왔고, 또 앞으로 계속 쌓여갈 스포츠다. 한번쯤 이렇게 모든 기록을 정리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면서 바로잡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어떻게 보면 점점 모든 것을 ‘쉽게’ 찾고 계산할 수 있게 되면서 세이버 매트릭스 같은 새로운 문화, 가공된 기록에만 점점 더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지 않나. 과거 우리가 쌓아온 고전적 기록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제대로 토대를 다지는 계기로 삼고 싶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