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 판매사들 배드뱅크 ‘주도’ 낙인 찍힐까 조심…업계 “판매 규모 큰 신한금융이 주도 가능성 높아”
1조 6000억 원대 규모의 환매가 중단된 라임자산운용 사태가 새국면을 맞았다. 금융당국과 라임 펀드 판매사들은 배드뱅크 참여를 두고 셈법이 복잡해질 전망이다. 사진은 지난 3월 26일 금융정의연대 회원과 라임사태 피해자들이 서울 중구 신한은행 본점 앞에서 펀드 판매사인 신한금융투자에 대한 철저한 검찰조사와 피해액 전액 배상을 촉구하고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배드뱅크 ‘주도’ 낙인에 판매사들 눈치게임
배드뱅크는 금융기관의 부실을 정리할 목적으로 부실 채권이나 자산만을 사들여 전문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임시 운영되는 금융기관이다. 국내 대표적인 민간 배드뱅크로는 부실 채권 정리 목적으로 2009년 6개 은행이 출자해 설립한 ‘유암코(연합자산관리)’가 있다. 라임 배드뱅크의 경우 환매 중단 사태 이후에도 펀드에서 무단으로 자금이 빠져나가는 등 부실 운용 논란이 일면서 금융당국과 판매사들 간 논의가 본격화된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감독원과 라임 펀드 판매사 19곳은 지난 4월 20일 첫 공식 회의를 열고 라임 배드뱅크 설립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서 양측은 배드뱅크 필요성 및 방향성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출자비율과 출자금액, 펀드 이관 범위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판매사들의 참여 확정 이후 논의하기로 했다. 금감원은 첫 회의 이후 지난 22일까지 참여 여부 결정을 요청했지만, 판매사들의 결정이 더뎌지며 설립 논의가 지연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은행과 신한금융투자, 대신증권 등 주요 판매사는 배드뱅크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일부 판매사들은 참여 조건을 제시하거나, 시간을 더 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결정을 미루고 있다. 주요 판매사들도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분위기다. 먼저 이름이 언급되면 자칫 배드뱅크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감원에 참여 입장을 밝힌 한 주요 판매사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라임 펀드 판매 규모가 큰 금융사와 먼저 접촉해 설립을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일부 회사는 공식 회의 전까지 배드뱅크 설립과 관련된 논의를 전혀 몰랐던 곳도 있다”며 “사건의 발단은 라임인데다, 이후 배상을 진행하게 될 부분도 있는데 19곳 가운데 굳이 먼저 특정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전했다. 다른 판매사 관계자 또한 “판매사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동참하지 않을 경우 (금감원이 제시토록 한) 대안이 없다”며 “금융업을 계속하려면 참여하는 쪽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기본적으로 민간 주도의 배드뱅크 설립을 지원만 한다는 입장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손실률을 명확히 한 다음에 회수 등이 뒤따라야 하는데, 조사 따로 배드뱅크 따로 진행하는 것이 엇박자처럼 비쳐질 수 있다”며 “금융당국 입장에서도 라임 사태에 판매사들을 내세우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신한금융지주 배드뱅크 주관사로 꼽히는 배경은?
배드뱅크 참여를 고심하는 판매사의 입장은 판매 규모 등에 따라 다르다. 라임 펀드 판매 규모가 큰 대형 금융사는 출자금액보다는 배드뱅크 설립 후 추가로 투입되는 비용이나 인력을 고민하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판매 규모가 작은 금융사는 배드뱅크 참여 자체에 따른 손익을 계산하고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신한금융지주가 다른 금융사보다 더 많이 출자하고 설립을 주도할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신한금융지주는 신한은행과 신한금융투자 등 두개 자회사가 판매사로 있는 만큼 라임 펀드 총 판매 규모가 크다. 신한금융지주가 판매한 라임 펀드 총 판매액은 6017억 원에 달한다. 더욱이 신한금융투자는 라임과 TRS(총수익스와프) 계약을 맺고 레버리지를 일으켜 손실률을 높였음에도 TRS 계약에 의해 펀드 자산에 대한 선순위 담보권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라임과 TRS거래를 한 곳은 신한금융투자와 KB증권, 한국투자증권이다. KB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은 각각 681억 원, 483억 원 규모를 판매한데 비해 신한금융투자는 3248억 원 규모를 판매하며 증권사 가운데 판매 금액이 가장 높다. 더욱이 신한금투는 라임이 투자한 코스닥 상장사들의 CB(전환사채)‧BW(신주인수권부사채) 거래와 관련해서도 의혹을 받고 있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판매사들은 모두 신한금융지주를 바라보고 있다”며 “신한금융지주가 먼저 출자하면 그에 비례해 다른 판매사들도 따라갈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불완전판매 여부가 최종적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고, 신한금융투자를 둘러싼 의혹도 현재 진행형인 상황에서 신한금융지주가 배상과는 다른 차원인 배드뱅크 설립에 앞장설 근거가 미약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앞서의 한 판매사 관계자는 “업계에서도 신한금투의 TRS 계약을 괘씸하게 보고 있고, 사후 커넥션 등이 밝혀지면 금융당국으로부터 강력한 제재를 받을 것”이라면서도 “TRS계약 자체는 문제되지 않아 당장 신한금투나 신한금융지주가 배드뱅크에 더 많이 출자하라거나 주도하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전했다.
다만 신한금융지주는 그룹 차원의 라임 배드뱅크 참여에 대해 선을 긋고 있다. 신한금융지주 관계자는 “배드뱅크의 방향성에 동의하고, 타 은행의 시선도 이해는 하지만 지주에서 세부 논의된 것은 없다”며 “어느 한 금융그룹이 주도해서 배드뱅크를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제 막 논의가 시작된 단계라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추후 신한금투에서 지주와 상의할 수는 있겠지만, 신한은행과 신한금투가 엄연히 계열사가 다른 만큼 지주에서 통합해 가지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