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엔 ‘일’하다 다쳤는데도 FA 자격 취득 등 불이익…구자욱 닷새 후 복귀 등 삼성이 새 제도 가장 잘 활용
2020시즌 프로야구에 메이저리그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부상자 명단’ 제도가 도입됐다. 사진=박정훈 기자
2018년까지 미국 현지에서 DL(Disabled List)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됐지만, 지난해부터 IL(Injured List)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됐다. 신체 일부를 다쳐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선수들에게 ‘장애가 있는(Disabled)’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자칫 장애인을 향한 편견을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 탓이다.
실제로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부상자 명단의 공식 명칭을 DL에서 IL로 바꾼다고 발표하면서 “장애인이 스포츠에 참가하거나 경쟁할 수 없다는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모두 ‘부상을 당한(Injured) 선수 리스트’로 명칭을 바꿔 사용하기로 했다”며 “이름만 수정했을 뿐 규정은 그대로 운영된다”는 입장을 전했다. 다행히 한국 언론은 처음 메이저리그 소식을 보도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 제도를 ‘부상자 명단’이라는 단어로 번역해 사용해왔다.
#메이저리그 부상자 명단 운영 방식은?
메이저리그 IL은 체계적인 방식으로 운영된다. 일단 메이저리그 로스터는 크게 25인 로스터와 40인 로스터로 구분된다. 25인 명단은 현재 빅리그에서 뛰고 있는 현역 선수 로스터. KBO 리그의 1군 엔트리와 같다. 40인 로스터에는 이 25명 액티브 로스터 외에 마이너리거들 중 타 구단이 룰5 드래프트에서 지명할 수 없도록 보호선수로 묶어 놓은 선수들과 15일 이하 부상자 명단에 등재된 선수들이 포함된다.
40인 로스터에 포함된 선수들을 네 차례 이상 마이너리그로 보내면 구단은 해당 선수에 대한 보유권을 잃는다. 이 때문에 구단들은 당장 빅리그에서 뛸 수준은 아니지만 다른 구단으로 보내기 아까운 유망주들을 부상자 명단에 등록해 40인 로스터 안에 남겨 놓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40인 로스터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 곧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이 40인 로스터 안에 든 선수가 다른 나라 리그에서 뛰고자 할 때는 구단이 이적료를 받을 수 있다.
부상자 명단은 크게 단기 10일·15일짜리와 장기 60일짜리로 나뉜다. 10일과 15일 부상자 명단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쓰임새도 많다. 2016년까지는 투수와 야수 통틀어 15일 명단으로 운영되다가 2017년부터 전 포지션 10일로 축소됐지만, 올해부터는 투수 부상자 명단만 15일로 다시 늘어났다. 부상자 명단 기한 축소 이후 일부 팀이 투수진 편법 운용에 악용하는 사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번 등재되면 투수는 15일, 야수는 10일 동안 메이저리그 경기 출장이 불가능하고, 대신 서비스타임은 인정받는다. 빅리그에서 뛰던 선수 한 명이 단기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 이 선수 대신 40인 로스터 안에서 대체 선수 한 명을 25인 로스터로 옮길 수 있다. 부상자 명단 등록 일자는 재활 진단을 받은 날짜가 아니라 마지막 출전 날짜를 기준으로 소급 적용된다. 부상 정도에 비해 10일·15일 공백이 너무 긴 선수들에게도 유용한 방식이다. 기한이 지난 뒤에는 마이너리그에서 재활 경기(Rehab Assignment)에 출전한 뒤 25인 로스터에 복귀할 수 있는데 타자에게는 최대 20일, 투수에게는 최대 30일이 각각 주어진다.
60일 부상자 명단은 팔꿈치 인대접합수술(토미 존 서저리)을 비롯해 장기간 재활이 필요한 부상이나 수술을 받은 선수가 이름을 올릴 수 있다. 구단은 60일 이상 경기에 기용하지 못하는 부상 선수를 그 기간 동안 40인 로스터에서 제외하고, 로스터 밖에 있는 마이너리그 계약 선수 한 명을 새로 로스터에 등록할 수 있다. 부상 선수가 로스터에서 제외된 기간 역시 메이저리그 서비스타임으로 계산되고, 소급 적용 대상이다. 다만 이 선수가 재활을 끝내고 복귀했을 때 40인 로스터가 꽉 차 있고 구단이 변동을 원하지 않는다면, 무조건 방출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60일 부상자 명단은 정규시즌 종료와 함께 자동으로 해제된다. 시즌 종료 30일을 앞두고 60일 부상자 명단에 오른 선수가 다음 시즌까지 남은 기간을 채울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부상자 등록 해제와 동시에 부상 선수는 40인 로스터에 복귀하거나 지명 할당(Designated For Assignment) 처리해야 한다. 구단들이 시즌 막바지에 멀쩡한 선수들을 부상자 명단으로 몰아넣고 자유계약 선수들을 무한정 영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만약 다음 시즌 초반에도 부상자 명단에 머물러야 하는 선수라면, 이듬해 스프링캠프 시기에 다시 등재 신청을 하면 된다.
이 두 가지 제도에 2011년 ‘뇌진탕 부상 리스트’가 추가됐다. 뇌진탕은 의학적으로 완치 기준이 불분명한 증상에 속한다. 특성상 후유증이 수일간 지속되긴 하지만, 일주일 이어지지 않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메이저리그는 뇌진탕 부상자에 한해 명단 등록 기간을 10일이나 15일이 아닌 7일로 줄여줬다. 뇌진탕 부상자 역시 복귀 전 마이너리그 재활 경기 출전이 가능하다.
삼성은 중심타자 구자욱을 개막 초반 부상자 명단에 올리며 새로운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사진=연합뉴스
#KBO 리그에 올해 도입된 한국식 부상자 명단
메이저리그에 비해 선수들의 1·2군 간 이동이 한결 자유로운 KBO 리그는 그동안 부상자 명단 제도 없이 이어왔다. 1군 엔트리 등록이 말소된 선수는 무조건 열흘이 지나야 복귀할 수 있었고, 부상으로 이탈한 기간은 현역 선수 등록 일수로 인정받지 못해 FA(자유계약) 자격 취득 등에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올해부터는 그렇지 않다. KBO도 마침내 KBO 리그 규정 제14조 3항에 관련 조항을 삽입해 부상자 명단 제도를 신규 도입했다. 현역 등록선수가 경기 또는 훈련을 하다 다치면, 한 시즌 최대 30일까지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메이저리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시행하되 KBO 리그 실정에 맞게 세부 규정을 손봤다. 10일과 15일, 30일로 부상자 명단 등재일을 구분하고, 신청한 기간 동안에는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더라도 현역 선수 등록 일수로 인정된다. 또 만약 부상이 예상보다 빨리 회복된다면 1군 복귀 기한인 열흘을 다 채우지 않고도 돌아올 수 있다.
부상자 명단 등재는 해당 시즌 1군에 최소 하루 이상 등록된 선수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부상자 명단 신청서에 부상 발생 일자와 발생 장소, 부상 부위와 사유, 요청 기간과 등재 시작 일자를 적은 뒤 최종 경기 출장일의 다음날부터 3일 안에 신청서를 KBO에 접수하면 된다. 이때 구단 지정 병원 또는 협력 병원에서 발급한 진단서를 첨부하는 것은 필수다. 한 시즌에 등록이 가능한 일수는 도합 30일. 10일짜리라면 3회, 15일짜리라면 2회, 30일짜리라면 1회 등록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개막하자마자 이 제도를 가장 잘 활용한 구단이 삼성 라이온즈다. 삼성 외야수 구자욱은 지난 5월 10일 오른팔 전완부 통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돼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그러나 닷새 후인 5월 15일 수원 KT 위즈 전부터 1군에 복귀해 다시 선발 출전했다.
지난해였다면 삼성이 구자욱을 1군 엔트리에 그대로 놔둔 채 5일간 선수 한 명을 가동하지 못하고 회복하기만 기다리거나 일단 구자욱을 1군 엔트리에서 제외한 뒤 통증이 다 사라진 후에도 1군 재등록 가능 기한까지 5일을 더 기다린 뒤 복귀시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터다. 그러나 부상자 명단 제도가 생기면서 삼성은 망설임 없이 구자욱을 1군 전력에서 제외했고, 출전이 가능한 상황이 되자 곧바로 불러들여 그라운드에 내보냈다.
이뿐만 아니다. 삼성 외국인 타자 타일러 살라디노도 5월 14일 가벼운 허벅지 통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가 사흘 만인 5월 17일 수원 KT 전에 앞서 1군에 돌아왔다. 살라디노 역시 자리를 비운 사흘간의 등록 일수를 모두 인정받았고, 삼성도 살라디노 대신 내야수 박계범을 2군에서 콜업해 엔트리의 공백을 실용적으로 채웠다.
그런가 하면 한화 이글스는 주장인 주전 외야수 이용규의 이탈 상황에서 새 제도의 덕을 봤다. 이용규는 지난 5월 13일 KIA 타이거즈 전에서 상대 투수의 공에 종아리를 맞아 타박상을 입었다. 골절은 아니었지만 이용규가 2016년에도 한 차례 종아리에 큰 부상을 입고 시즌을 도중에 마감한 전력이 있던 터라 한화 구단은 신중을 기했다. 이용규는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채 회복에 전념했고, 등록 6일째인 지난 5월 19일 수원 KT 전에 앞서 다시 전열에 복귀했다.
모든 부상 선수가 이들처럼 부상자 명단의 특수성을 잘 활용한 뒤 단기간에 회복을 마치고 복귀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다. 공교롭게도 개막 초반부터 각 전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핵심 주전 선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으로 끊임없이 쓰러져 걱정을 샀다. 부상자 명단 단기 등재자보다 장기 등재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형국.
LG 트윈스는 시즌 전 연습경기에서 외야수 이형종이 상대 투수의 공에 손등을 맞아 중수골 골절로 개막 엔트리에 합류하지 못했다. 6주 진단을 받고 재활 중이다. 지난해 발굴한 강속구 마무리 투수 고우석의 이탈은 더 뼈아프다. 고우석은 불펜피칭 도중 통증을 호소한 뒤 왼 무릎 반월판 연골이 손상됐다는 진단을 받아 지난 18일 수술대에 올랐다. 재활까지는 3개월이 필요해 시즌 후반에나 복귀가 가능할 전망이다.
롯데 자이언츠는 주전 내야수 정훈이 경기 도중 왼쪽 옆구리 내복사근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회복까지 4~6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KIA는 왼손 핵심 불펜 하준영이 팔꿈치 인대접합수술로 올 시즌 뛰지 못하게 됐고, SK 와이번스는 공수 모두 비중이 큰 주전 포수 이재원이 개막 3경기 만에 엄지손가락 골절로 최소 6주간 자리를 비우게 돼 가장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SK는 설상가상으로 외국인 에이스 닉 킹엄마저 팔꿈치 근육 뭉침 현상으로 부상자 명단 신세를 져 시즌 초반 극심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화 외국인 타자 제라드 호잉도 벌써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공수에서 펄펄 날던 유격수 하주석과 팀 타선의 활력소 역할을 하던 멀티 내야수 오선진이 나란히 부상으로 이탈하는 악재까지 겹쳤다. 또 KT 외야수 유한준과 키움 히어로즈 외야수 임병욱, 두산 베어스 내야수 오재일 등도 한참 맹활약하던 도중 부상에 발목을 잡혀 차례로 부상자 명단 등재 신청서를 냈다. 도입 첫 해 백지로 출발한 부상자 명단이 점점 ‘빅 네임’으로 가득 차는 모습이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