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팔코사놀배 결승 박정환 꺾고 국내 평정…국내기사 중 AI ‘블루스팟’ 가장 많이 착점
신진서가 쏘팔코사놀 최고기사결정전 결승에서 랭킹 2위 박정환을 3 대 0 스코어로 누르고 우승했다. 사진=사이버오로
신진서가 한국랭킹 1위에 오른 2020년 1월부터 공식대국 전적은 35승 4패다. 랭킹 점수를 넘어서 성적으로 국내 일인자임을 입증했다. 결승에 올라서는 단 한 판도 지지 않은 점도 특이하다. LG배와 쏘팔코사놀배 결승에서 박정환을 넘어섰다. 박정환을 상대로 공식전적은 아직 9승 16패지만, 올해만 따지면 5승 1패로 압도적이다.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면 최소한 ‘박정환 타파법’은 발견한 게 아닐까.
복기를 마친 신진서에게 물었다. “최근 박정환 9단과 둘 때는 무리수를 최대한 자제한다. 전투적인 수법을 먼저 걸진 않는다. 워낙 응징을 많이 당해서…”라면서 웃었다. “너무 많이 져서 이젠 이길 때가 된 거다. 완패를 당한 적도 너무 많았기에 이번에 이겼지만, 실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박정환 9단을 포함해 세계정상급 몇 명의 기사는 언제나 5 대 5 승부다”라고 밝혔다.
중국의 일인자 커제도 이번 박정환과 겨룬 결승전을 보며 신진서의 바둑을 여러 차례 칭찬했다. 지난 LG배 본선에서 승리한 후에 말장난하던 분위기와는 달랐다. 아직 자신도 넘어야 할 산, 박정환을 너무 쉽게 무너뜨리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서일까. 커제는 결승 2국 중반, 백78수(장면도1의 백9수)를 보고 중국 예후바둑 대국실 해설창에 등장해 “지금 신진서는 인공지능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다. 인형(人形) AI다”라고 극찬했다.
[장면도1 ‘아름다운 사석작전’] 최고기사결정전 결승2국 ●박정환 ○신진서 우상귀에서 서로 끊어가며 살벌한 싸움을 시작했다. 신진서는 백돌(세모 표시)을 가볍게 버리고 중앙에 세력을 쌓았다. 이어서 백9(실전 백78수)로 뛰어나가자 중앙 백 세력이 활짝 피었다.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오는 자리. 보면 볼수록 은은한 향이 풍기는 고수의 한 수다. |
중국에서도 신진서의 별칭은 ‘신공지능(申工智能)’이다. 중국 바둑사이트에선 알파고가 은퇴한 후 현존 최고의 AI로 불리는 ‘절예’가 다음 수를 예측한다. 결승3국에서 신진서가 흑139수를 두자 중국사이트 해설자는 “절예도 인간의 영역을 넘어섰지만, 샤오신(신진서) 너는 진짜 알파고 같다”면서 절예의 참고도를 능가하는 신진서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냈다.
[장면도2 ‘버리고 이긴다’] 최고기사결정전 결승3국 ●신진서 ○박정환 좌하귀 백은 흑이 먼저 두면 단패로 잡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신진서는 흑4(실전 139수)로 다시 사석작전을 펼쳤다. 백이 5를 두어 흑을 잡았지만, A와 B로 번갈아 두는 양패가 남았다. 결국 이 양패가 나중에 흑승을 결정짓는 뇌관이 되었다. |
AI바둑프로그램에선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추천수 중에서 가장 승률이 높은 수가 파란색으로 표시된다. 프로기사들은 이 점을 ‘블루스팟’이라고 부른다. 초반 50수 정도는 아마추어 고수들도 블루스팟에서 착점이 벗어나지 않는다. 외워서도 가능한 초반 포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반은 다르다. 난해한 전투와 정밀한 계산력이 필요한 바꿔치기, 전체와 부분을 오가는 수읽기에서 모두 길을 잃는다. 국내 기사 중에서 중반전에 블루스팟을 가장 많이 두는 기사가 신진서다. 특히 이번 결승전에선 AI 특유의 ‘키워 버리는 수법’을 자주 사용하며 박정환을 녹다운시켰다. 다른 이들과 다른 깨달음이 있었을까.
신진서는 “중반 이후에 선택은 내가 좋아하고 자신 있는 전투바둑 방향으로 간다. 그래도 블루스팟 일치율이 다른 기사들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2국에서 우상귀는 버리려고 생각하고 버렸다. 하지만 3국에서 나온 좌하귀 모양은 버렸다기보다는 그냥 죽은 거에 가깝다. 처음에는 (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국후 살펴보니 원래부터 형세가 유리해서 그런 거지 사석작전 자체가 좋은 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인형(人形) AI 신진서’란 커제의 발언에 대해선 “이게 그냥 칭찬인지, 조사해봐야겠네요”라면서 웃었다. “커제 9단은 제일 이겨야 할 대상이지만, 가장 잘 질 수 있는 상대다. 커제뿐 아니라 아직 넘어야 할 라이벌이 너무 많다. 이제 시작이다”라고 덧붙였다.
국내 정상에 선 신진서. 다음 목표는 세계대회다. “1년에 최소한 세계대회 한 개는 우승하도록 노력하겠다. 두 개, 세 개를 우승하면 가장 좋지만, 초일류기사를 상대로 승률 55%를 유지해도 우승을 독식하긴 어렵다. 곧 춘란배와 응씨배 등이 온라인으로 열린다. 잘 적응해야 할 것 같다. 프로기사 중에서 인터넷 대국이 약한 이는 있지만, 특별하게 강한 기사는 없다. 실력발휘에 바둑판과 모니터가 큰 차이 없다. 다만 바둑판에서 두면 승부호흡도 더 느끼고 지더라도 아픔이 덜하다. 실제 온라인으로 치러진 지난 LG배 본선에선 이겼을 때 느낌은 비슷한데 지고 나서 허무함이 아주 컸다”라는 감상이었다.
[장면도3 ‘양패로 잡은 백대마’] 최고기사결정전 결승3국 ●신진서 ○박정환 흑1이 실전 마지막 수다. 이 수를 보고 박정환이 돌을 거뒀다. 이후 백이 2로 막아도 흑은 3으로 들어간다. 백이 C의 약점을 보고 백이 D를 먹여치고 E로 막으면 흑도 바로 F로 막아 패에 전체 대마(네모 표시) 생사가 걸린다. 그러나 패가 생기면 좌하귀 양패(X표시)에서 나오는 무한 팻감을 당할 수가 없다. |
최종국이 된 최고기사결정전 결승 3국은 23일 저녁 6시를 넘겨 끝났다. 박정환과 신진서는 머리를 맞대고 1시간 넘게 대국을 복기했다. 국후 박정환은 “최종국은 정말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실력이 부족했다. 이번 결승전을 통해서 많이 배웠고, 부족한 점도 깨달았다. 운이 닿는다면 내년에 다시 도전하겠다”라고 말했다. 신진서의 국내 평정은 박정환에게도 좋은 일이다. 과거 이창호가 일인자였던 시절은 조훈현, 유창혁, 서봉수가 같이 성적을 내주었다.
이세돌이 잘나갈 때도 최소한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 등 ‘이창호 키드’들이 함께 최전선에서 뛰었다. 박정환이 한국바둑을 대표한 지난 5~6년은 약간 애매하다. 늘 외롭게 혼자 싸워야 했다. 이젠 성적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후배가 생겼다. 세계대회에서 무너지면 안 된다는 무형의 압박감은 지금부터는 신진서의 몫이다. 한편으론 부담감이란 족쇄에서 풀려난 박정환이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세계대회는 실력만으로 우승하는 게 아니라는 걸 박정환이 가장 잘 안다.
쏘팔코사놀 대회 결승 3국 복기 장면. 왼쪽이 신진서. 사진=사이버오로
AI는 두려움이 없다. 다 잡으려는 경솔한 욕망이 없다. 단수 치며 느끼는 쾌락이 없다. 집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다. 돌을 집착 없이 쉽게 버린다. 저 높은 곳에 서서 오직 이기는 길만 찾아가는 반전무인(盤前無人)의 기사다. 지금 신진서가 그렇다. 돌이켜보면 흔하게 지나가던 대회 한두 개 결과가 바둑계 전체의 흐름을 바꾸곤 했다. 과거 일인자 교체는 늘 이런 패턴이었다. 6월에 치러진 결승전, 신진서의 우승 2번이 주는 의미다. 박정환, 커제, 양딩신이 ‘신의 행마’를 쫓는 시대는 이제 시작이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