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이세돌은 대선배 도발 자신감 다져, 반면 현재 커제는 패배한 상대 뒤통수 갈기는 수준
제25회 LG배 16강전에서 맞붙은 신진서(위)와 커제. 코로나19의 여파로 한국과 중국에서 인터넷으로 대국을 치렀다. 사진=한국기원·시나바둑
17년 전엔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공포가 바둑계를 엄습했다. 중국 관련 세계대회와 교류전 등이 대부분 연기되거나 장소를 변경했다. 그래도 LG배는 일정만 약간 연기해 6월에 정상적으로 본선을 치렀다. 이후 사태가 진정되고 나선 8강전을 사스 진원지였던 중국에서 열었다. 당시 8강 진출자가 이창호, 이세돌, 조한승, 목진석, 김주호, 원성진, 왕레이(중국), 창하오(중국) 9단이다. 제8회 LG배 세계기왕전 합동기자회견이 열린 건 그해 10월 27일이다. 상하이 왕바오허호텔 다목적홀은 40명이 넘는 신문, 방송기자가 자리를 가득 메웠다.
각국 단장은 일어서서 의례적인 덕담을 했고, 담백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선수는 이창호, 이세돌, 창하오, 왕레이까지 한중 대표 두 명씩 단상으로 섰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중국 ‘남방체육신문’ 기자가 이세돌에게 질문했다. “세계정상급 기사라면 이창호, 조훈현, 마샤오춘 9단이 있다. 실력까지 포함해 좋아하는 또는 존경하는 기사는 누군가?” 이세돌은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누구도 존경하진 않는다. 그러나 다 좋은 기사라고 생각한다. 아! 한 사람은 빼달라. 마샤오춘은 아니다.” 약간은 거슬린 질문에 대한 즉흥적인 반발이었다. 철없는 스무 살 청년이 가진 치기, 딱 그때가 아니면 못 했을 말들이다.
이세돌은 나중에 자서전에서 “한 해에 세계기전 타이틀 두 개를 석권하고 나니 세상 무서운 게 없어졌다. 마음속에는 내가 최고라는 자만심이 꽉 차 있었다”고 이 시절을 회상했다. 어쨌든 당시 마샤오춘 9단을 깎아내린 발언은 중국인들 가슴에 앙금을 남겼다. 물론 은퇴할 즈음 30대 후반 이세돌은 기자들이 아무리 도발해도 “잘 안 들리는데…”라며 슬그머니 웃어넘기는 여유가 생겼다.
2003년 제7회 LG배 결승 4국 복기 장면. 이세돌(오른쪽)이 이창호를 꺾고 우승했다. 사진=월간바둑
2015년 이세돌(오른쪽)과 커제의 제2회 몽백합배 결승 5번기 최종국. 사진=사이버오로
그의 공격적인 바둑스타일은 신진서가 이어받았지만, 사람 놀리는 장난꾸러기 기질은 중국기사 커제가 가장 닮았다. 2015년 11월, 만 18세 커제는 제2회 몽백합배 결승을 앞두고 “이세돌이 이번 대회에 우승할 확률은 5%다. 전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라며 신경을 건드렸다. 실제로 이후 벌어진 결승 5번기에서 이세돌을 3 대 2로 꺾어 버렸다. 최종국은 중국룰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반집을 남긴 극적인 내용이었지만, 이 결과는 중국으로 세계바둑 패권이 넘어간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후에도 둘은 삼성화재배 준결승 3번기, 농심신라면배 최종국 등 중요한 승부의 길목에서 만났다. 이세돌은 (술을 마신) 사석에선 “커제 따위는”이라고 말하며 자신만만했으나 은퇴 전까지 ‘전설이 막을 내렸다’는 말을 반상에서 응징하진 못했다.
2020년 6월 1일부터 8일까지 제25회 LG배 본선이 열렸다. 이번에는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영향으로 본선 32강과 16강이 인터넷에서 치러졌다. 바둑사이트 사이버오로 대국실을 기반으로 한국·중국·일본·대만기원을 온라인으로 연결했다. 심판과 진행요원이 대국장을 지켰고, 현장에 웹캠과 카메라를 설치해 실시간 상황을 서로 모니터링했다. 한국 16명, 중국 9명, 일본 5명, 대만 2명이 나와 본선 32강전이 끝나자 일본, 대만 선수가 모두 떨어지고, 한국 9명, 중국 7명이 남았다. 이어서 벌어진 16강전 후에는 한국 6명, 중국 2명이 생존했다.
8강에 오른 한국 선수는 박정환, 신민준, 변상일, 강동윤, 원성진, 이태현이다. LG배에서 한국기사가 8강에 여섯 명이 오른 건 2003년 이후 처음이다. 17년 전에 10대 소년으로 8강에 이름을 올렸던 원성진 9단은 올해 35세 최연장자로 남았다. 작년 12월 군에서 갓 제대한 30대 프로기사 이태현 7단도 중국랭킹 4위 구쯔하오를 꺾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남은 중국기사 두 명은 중국랭킹 1위 커제 9단과 2위 양딩신 8단이다. 한국이 인원이 많다고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8강전은 11월 9일 열린다. 신진서가 없는 8강 대진표를 한참 바라보던 국가대표팀 목진석 감독은 희비가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커제는 신진서와의 대국 직후 웨이보에 묘한 멘트를 남겼다. 사진=시나바둑
신진서는 8일 벌어진 16강전에서 탈락했다. 백을 쥔 커제를 상대로 중반까지 판을 주도했지만, 중반 이후 이해할 수 없는 패착을 둬서 역전패했다. 대국 직후 커제는 자신의 웨이보(중국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종국 장면 등 사진과 함께 묘한 멘트를 남겼다. 커제가 쓴 문자를 적나라하게 의역하면 “애송이야, 애송이”다. 신진서를 암시하는 말이다. 마지막 사진에는 “이게 뭔가?”라는 말을 더했다. 해석하기에 따라 ‘실력이 겨우 이 정도였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신진서가 둔 마지막 패착을 조롱하는 뜻일 수도 있다. 승자 커제가 올린 짧은 문장을 보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중국 바둑팬 5만 6000명가량이 ‘좋아요’ 표시를 눌렀다.
이세돌과 커제는 알파고를 경험한 인간 1호와 2호. 묘하게 언론을 끌어들이는 언변과 스타 기질도 공통점이다. 스무 살 때 이세돌도 대선배 조훈현 9단을 두고 “10연패(당시 8연패)는 채워주셔야죠”라고 아주 건방진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커제가 이세돌에게 뭐라고 도발해도 ‘껄끄러운 선배와 승부를 앞에 두고 기세가 눌리지 않게 자신감을 다지는 방법’이라고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자기보다 세 살 어린 기사와 승부가 끝난 후에 반외의 잽을 날리는 건 이상하다. KO패 당해 실려 가는 상대 뒤통수를 한 번 더 갈기는 느낌이다.
신진서는 필 받으면 모두 부수고 돌진하는 ‘헐크’, 커제는 정밀하게 약점을 포착해서 광자포를 날리는 ‘아이언맨’이다. 한방 세게 때리고, 손닿지 않는 곳에서 입으로 골리는 건 아이언맨답다. 어쨌든 패자는 유구무언(有口無言), 승자는 ‘무구유언(無口有言)’했다. 신진서와 커제, 한중 일인자 대결은 반외 신경전으로 더 흥미진진해졌다. 둘은 언제 다시 만날까.
박주성 객원기자
[승부처 돋보기] 까칠한 커제에 피 끓는 신진서 제25회 LG배 16강전 2020.06.08. ●신진서 9단 ○커제 9단 174수 백불계승 장면1 #장면1 ‘타이밍의 묘수’ 초반 AI(인공지능) 승률은 흑이 약간 앞서 나갔다. 우하 백을 몰아가다 툭 던진 흑7이 절묘하다. 실전에서 커제는 눈물을 머금고 A자리로 이었다. 이 타이밍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B로 막는다. 지금은 사활이 걸려있는 하변 백이 있어 흑이 A로 뚫고 나올 수 있다. 흑은 X표시에 아무 곳이나 둬도 백 양쪽이 곤란해진다. 타이밍이 절묘한 묘수였다. 장면2 #장면2 ‘뒤틀린 중앙전’ 흑은 집으로 계속 앞선 형세였고, 두텁기까지 했다. 하지만 냉정하지 못했다. 일례로 중앙 백돌을 공격하는 척하고 잡은 돌(세모 표시)을 둘러싼 울타리만 하나만 세웠어도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흑3으로 중앙을 두니 백은 선수교환 후에 바로 6, 8을 두어 좌상귀에 승부패를 만들었다. 장면3 #장면3 ‘통한의 역전패’ 커제는 위기 속에서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며 영리하게 버텨갔다. 초반부터 주도권을 쥐고 판을 압도한 신진서는 상대가 계속 까칠하게 버티자 피가 끓었다. 흑3으로 그냥 뻗은 수가 모두가 고개를 흔든 실수, 결정적인 패착이다. 일단 흑5자리로 패를 한번 교환했다면 아직 해볼 만한 바둑이었다. 중앙에서 당하고, 백12로 막히니 흑승률이 급전직하했다. 우변 수상전은 나중에 한수 늘어진 패가 되었지만, 흑이 승부를 뒤집긴 어려웠다. 박주성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