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정부 시절 대북라인 복원해 남북관계 개선 의지…통일장관 내정 이인영 대권주자 스펙 쌓을지 주목
박지원 신임 국정원장 후보자. 사진=박은숙 기자
개성공단 내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김여정의 문재인 대통령 비방 담화 등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로 접어들던 6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대북 전문가들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가졌다. 여기엔 박지원 전 민생당 의원도 있었다. 문 대통령과 참석자들은 현 시국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눴고, 향후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문 대통령이 박 전 의원의 국정원장 내정을 결심한 것도 이 무렵 직후라고 전해진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박 전 의원이 문 대통령에게 북미 대화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고, 구체적인 해결책 등을 제안했다. 문 대통령이 박 전 의원의 국정원장 발탁결심을 이날 오찬이 끝나고 난 뒤 굳힌 것으로 안다”면서 “통일부 장관 사의 표명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던 연쇄 인사의 마지막 퍼즐을 박 전 의원이 풀어준 것”이라고 전했다.
인사를 앞두고 박 내정자 이름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오히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정원장으로 임명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통일부 장관 이인영, 국가안보실장 서훈, 국정원장 임종석 발표가 임박했다는 게 골자였다. 하지만 ‘국정원장 임종석 카드’는 처음부터 고려대상은 아니라고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인사와 관련해 말이 돌자 참모들을 질책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례적으로 기자들에게 “인사는 발표를 할 때 보도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 후 국정원장 교체가 미뤄질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7월 3일 박지원 국정원장 내정을 발표했고, 이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사였다. 그만큼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됐던 셈이다.
박 내정자는 인사 소식이 알려진 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역사와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 애국심을 갖고 충정을 다하겠다. 앞으로 제 입에서 정치라는 정자도 올리지 않겠다”면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하염없이 떠오른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 내정자는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 1세대를 주도한 인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DJ) 최측근으로 꼽히던 박 내정자는 1992년 국회에 입성했다. DJ가 대권을 쥐기 전부터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동교동계 핵심으로 통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선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중용됐다.
2003년엔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 연루돼 징역 3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박 내정자는 2007년 특별사면된 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당선되며 재기에 성공했다. 박 내정자는 1992년 14대 때 국회에 데뷔한 뒤 18~20대 총선까지 3차례 더 국회에 등원했다. 박 내정자의 ‘국회 생활’은 21대 총선을 기점으로 막을 내렸다. 박 내정자는 전남 목포 지역구에 민생당 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득표율 37.34%(4만 7528표)를 얻는 데 그치며 낙선했다.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 기념사진. 맨 오른쪽 ‘영원한 DJ의 비서실장’ 박지원 전 의원이 보인다. 사진=연합뉴스
낙선한 뒤 활발한 방송 및 정치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7월 3일 신임 국정원장 후보자로 전격 내정됐다. 인사 소식을 들은 한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박 전 의원을 신임 국정원장으로 내정한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라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청와대가 향후 대북 정책에 있어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으로 판단된다. 청와대가 기존 대북 라인으론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어렵다고 본 것 같다. 이번 인사는 과거 김대중-김정일 시절 대북 라인을 복원해 남북관계 개선을 꾀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관계가 호전됐던 사실을 상기하며, 그 당시 핵심 실무자로 활동했던 박 내정자의 힘을 살려 남북관계를 재건해보자는 의도가 이번 인사에 담겨 있을 것”이라면서도 실효성엔 의문부호를 달았다. “박 내정자가 ‘햇볕정책 1세대’로 실무를 담당할 당시 북한 쪽 카운터 파트들은 다 사라졌다”는 게 이유였다.
전직 군 정보기관 관계자 역시 “아무리 햇볕정책 1세대 실무자였어도 박 내정자가 꼬여 있는 남북관계를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관계자는 “남북관계는 한국 쪽 인사가 바뀐다고 풀리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북핵문제에 있어 미국과 북한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 햇볕정책 1세대 할아버지가 와도 풀리지 않는 것이 남북관계”라고 했다.
정치평론가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연구위원은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이 국정원장이 됐다”면서 “DJ와 김정일 관계가 좋았을 때의 영광을 회복시켜보겠다는 청와대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DJ의 가신과 김정일의 아들(김정은)이 긍정적인 화학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지 여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인영 신임 통일부 장관 내정자. 사진=박은숙 기자
신임 통일부 장관으론 원내대표 출신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내정됐다. 이 내정자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기 의장 출신으로 남북관계의 중요성을 꾸준히 역설해왔다. 20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마지막 원내대표를 지낸 이 의원이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되면서 정치권에선 “이 내정자가 대권 주자로 클 수 있는 스펙을 쌓게됐다”는 이야기도 돈다.
신임 국가안보실장으론 서훈 국정원장이 임명될 예정이다. 서 원장은 1980년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에서 활동을 시작한 뒤 28년 동안 줄곧 대북·정보 파트에서 실무를 봤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원 대북전략실장, 제3차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북한 신포 경수로 건설을 위한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 사업 당시 북한 금호사무소 현장사무소장으로 2년간 북한에 상주한 경험도 있다. 서 원장은 ‘한국인 중 김정일을 가장 많이 만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채진원 연구위원은 “청와대에서 통일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있는 인물을 통일부 장관과 국가안보실장 후보자로 지명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악화된 남북관계를 친밀감을 바탕으로 해결할 의지가 담겨있는 모양새”라고 이번 인사를 분석했다.
이어 그는 “청와대가 이인영 의원을 신임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한 데엔 차기 대권 경쟁 구도까지를 염두에 뒀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면서 “전대협 의장 출신에 86그룹 대표주자 격인 이 의원의 경우 통일부 장관 경력이 향후 대권 구도에서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