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도 군 인권센터 같은 감시기관 필요…가해자 공감보다 피해자 공감 우선을”
그 사이 체육계와 정치권에선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경기) 국가대표 출신 고 최숙현 선수를 둘러싼 상습 폭행 사건이 큰 논란이 됐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비서 성추행 논란이 불거지기 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미투 전문가’는 두 사건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일요신문이 7월 23일 오전 김 코치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은희 테니스 코치. 사진=임준선 기자
―공천을 받지 못한 뒤 어떻게 지내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지내고 있다. 공부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다. 체육계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아동학대·성폭력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 연락하고 있기도 하다. 인권 관련 이슈가 예민한 시기다. 아직 변화하지 않은 점이 많아 그런지 몰라도, (인권) 피해자들은 여전히 힘들어하는 상황이다.”
―정치권에 잠시 발을 담갔던 소회가 궁금하다.
“후회는 없다. 정치권에서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인권 분야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역량이 커지기도 했다. 정치인이 됐어도 좋았겠지만, 안 돼서 더 좋은 부분이 분명 있다. 인권 분야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진 것으로 만족한다. 피해자들이 피해 이후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도와주고 싶다. 꿈이 생긴 셈이다. 피해자들을 돕는 단체를 만들려고도 준비 중이다.”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출신 고 최숙현 선수 사건이 터졌다. 엘리트 체육계 병폐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트라이애슬론에서 사건이 터졌지만, 다른 종목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내가 몸담고 있는 테니스도 그렇다. 빙상이나 축구 등 다른 종목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져 왔다. 어느 한 사람의 문제라 하기에도, 구조적인 문제라 하기에도 애매한 문제다. 정치권이 이런 사건들을 처리해 나가는 걸 보면 어느 한 요소에만 포커스를 맞춰서 깨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엘리트 체육계 병폐를 고치는 것은 상당히 복합적인 문제다.”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이 22일 오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열린 ‘철인 3종 경기 선수 가혹행위 및 체육 분야 인권침해에 대한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복합적인 문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시간이 필요하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모든 것을 손바닥 뒤집듯 바꿔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이든 시스템이든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바꿔야 한다. 장기적인 계획을 토대로 변화의 성과가 나오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정책이나 법안이나 한순간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바라는 기대감 하나로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터지면 난무하기 시작하는 해결책이 뚜렷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엔 그 많던 해결책들이 ‘틀렸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슈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이처럼 극단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목은 아쉽다.”
―고 최숙현 선수 사건을 두고 대한체육회, 트라이애슬론협회, 소속팀 경주시청 등 관계 기관의 직무유기 비판이 뜨겁다.
“그런 견제 시선은 필요하다고 본다. 체육계에도 군 인권센터 같은 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군 인권센터를 둘러싼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보다도 체육계 전반에 걸친 감시 기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감시도 감시지만 관리자들이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할 필요성도 있다. 군의 경우엔 병사가 비위 행위를 저지르면 관련 지휘관들이 모두 책임을 진다. 반면 체육계엔 ‘꼬리 자르기’가 횡행한다. 관리소홀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경우가 적다. 체육계에서도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윗선의 관리 책임을 묻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면 ‘탁상공론-사건 재발’이라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 같다.
“체육계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폭행·성폭력 사건은 계속 재발한다. 중·고등학교 아이들 사이에서도 집단폭행, 성폭행이 끊임없이 재발한다. 아동학대, 음주운전 등 사건도 마찬가지다. 시스템적인 변화가 없어서가 아니다. 이런 현상을 악순환의 반복이라고 치부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 체육계에서도 사건·사고들 중 하나가 일어나는 거지 악순환 반복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이런 이슈들이 터지다보면 체육계 종사자들 인식이 변화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내부적인 노력이 얼마나 이뤄지냐에 따라 문제 해결과 변화의 속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은희 테니스 코치. 사진=임준선 기자
―박원순 전 서울시장도 성추행 사건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현 시점 생존자 중 그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피해자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 피해자는 유일한 목격자이며 증인이다. 한 사람밖에 알 수 없는 진실에 대해 전 국민이 관심을 갖고 판단을 하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현재 드러난 사실로 봤을 때는 피해자가 있고 피의자가 존재한다. 최숙현 선수 사건에선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면, 서울시 사건에선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할 경우 피해자는 어떤 심경일까.
“피해자 입장에서 용기를 내 진실을 밝히려 마음을 먹기 전, 대부분이 그런 걱정을 마주한다. 나 역시 진실을 말하기 전 ‘가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했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가 ‘그래 잘 죽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나 혼자 조용히 딱 안고 갔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며 ‘내가 잘못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이번 사건 피해자 역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 우려도 많다.
“유죄와 무죄가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선 가해자로 지목되는 이를 무죄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미투를 했다고 피해자를 무조건 옹호하는 시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를 둘러싸고도 항상 따가운 시선이 존재한다. 현 상황에서 미투를 할 경우엔 피해자가 피해자여야 하는 이유가 너무 많다. 일단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밝히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선 피해자의 아픔을 섣부르게 추측하거나, 가해자의 무죄를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 사진=서울시
―박 전 시장 사건 둘러싼 2차 가해 논란, 어떻게 봤나.
“가해자 공감보다 피해자 공감이 우선시됐으면 한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의견은 최대한 배제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 중에선 해당 사건 피해자의 성추행·성희롱 증언이 있다. 통상적으로 아동학대 사건에선 피해 아동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성범죄에선 다르다. 피해자 공감보다는 편 가르기 식 논쟁이 많이 벌어진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아동학대 이야기와 비교를 해볼 수 있다. 아동학대 사건 피의자를 논할 땐 무죄 추정의 원칙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성범죄 사건 피의자를 논할 땐 무죄 추정의 원칙이란 단어가 적잖이 등장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일부 성범죄의 경우엔 사건 당사자 간 감정이 들어간다. 사건 당사자 간 관계 혹은 감정에 따라 유죄냐 무죄냐가 결정난다. 기준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최 선수와 박 전 시장 사건엔 ‘위계 논란’ 공통점이 있다.
“위계에 의한 사건도 여러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사건 당사자들 서열에 따라, 가해자 위력에 따라 사건 영역이 달라진다. 사건 당사자 간 서열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가 있고, 비슷한 서열인 경우도 있다. 위계에 의한 폭행·성폭력 사건의 경우엔 피해자가 용기를 내기 더욱 어렵다.”
―체육계 미투 사상 최초로 가해자의 유죄를 입증한 뒤 정치권 입성에선 고배를 마셨다.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개인적으론 아이들에게 테니스를 계속 가르치는 것이 꿈이다. 테니스 기술과 인권 두 가지에 대한 공부를 병행할 예정이다. 더 나아가선 체육계뿐 아니라 수많은 범죄 피해자가 피해 이전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열심히 노력하면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바뀔 것이라 생각한다. 좀 더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