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무원의 욕설·가혹행위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당직사령, 보고하느라 ‘소생’ 골든타임 놓쳐
사망 하루 전 김상엽 일병이 자신의 신병수첩에 쓴 내용이다. 김 일병은 2003년 9월 28일 위병소 난로 설치를 마친 뒤인 오후 2시 45분쯤 사라져 오후 3시 25분쯤 목맨 채로 발견됐다. 오후 4시 12분쯤 민간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김 일병은 숨을 되찾지 못했다.
육군훈련소 조교와 훈련병이 모포와 침낭을 세탁 맡기기 위해 옮기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공식 대한민국 육군 유튜브 영상 캡처
세탁병으로 일했던 김 일병은 하루하루를 지옥에서 보냈다. 군무원이자 세탁반장이었던 최 아무개 씨와 박 아무개 씨의 얼차려와 욕설을 견뎌야 했다. ‘미친놈들’, ‘XXX들’, ‘XXXX들’이라는 말은 물론 세탁 트레일러 분리작업에 미숙했다는 이유로 ‘엎드려뻗쳐’ 시키는 일이 다반사였다. “상엽아 넌 일병이나 되는 놈이 뭐야 바보야?”라며 후임들 앞에서 김 일병에게 보낸 냉소는 덤이었다.
현행 육군 얼차려 규정에 따르면 소대장급 이상 지휘자 또는 지휘관의 승인을 얻은 사람만 병사에게 얼차려를 줄 수 있다. 군무원은 병사에게 얼차려를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수치심을 느끼거나 가혹행위(고통)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규정 위반이었다. 하지만 최 씨와 박 씨는 부대를 관리·감독하는 여 아무개 중대장의 묵인 아래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다. 여 중대장은 군무원을 통제하기는커녕 김 일병에게 ‘X신’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장애를 비하하는 ‘X신’이라는 말은 김 일병에게 비수로 날아들었다. 김 일병의 왼팔은 온전치 않았다. 27도나 휘어져 팔을 완전히 펼 수도 없었다. 성장 근육이 파열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김 일병의 첫 중대장이었던 신 아무개 대위는 “왼쪽 팔이 완전히 꺾인 상태로 힘이 없음. 군의관 면담 후 의가사제대 가능 여부 확인”해야 한다고 기재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장난치다가 소형 냉장고 위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진 김 일병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전투복을 입어도 튀어나온 팔이 감춰지지 않을 정도였다.
김상엽 일병. 사진=김상엽 일병 아버지 김종기 씨 제공
자신의 장애로 부대원에게 폐 끼치기 싫었던 김 일병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했다. 그의 성실함은 불편한 왼팔로 살아오면서 얻은 습관 혹은 열등감의 발로였다. 김 일병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살펴보면 ‘책임감이 강하며 모든 일에 적극적이다. 언행이 바르다’는 기록이 전 학년에 걸쳐 나온다. 후임들은 김 일병을 좋아했다. 후임들에게 김 일병은 누구보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 100일 휴가를 앞둔 후임들의 전투화를 손수 닦아주던 선임이었다.
부대원 모두가 김 일병에게 호의적이었던 건 아니다. 일부 선임은 그를 무시하거나 괴롭혔다. 김 일병은 낮엔 근무지에서, 밤엔 내무반에서 밤낮없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김 일병이 신병수첩에 남긴 일기의 일부 내용이다.
“훈련 연습 날이었다. 역시나 힘들었다. 그래도 갈굼 안 받아서 그나마 편했던 것 같다. (중략) 지금은 내무실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 아무도 없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올 때 행복하다.”(2003년 4월 1일)
“지금은 너무 힘들다. 정신이나 육체 모두가 힘들다. 특히 김 병장이 너무 힘들다. (중략) 이곳은 감옥이다. 인권, 자존심, 모든 것이 짓밟혀 있다. (중략) 난 열악한 환경에서도 매일 행복했다. 군대는 확실히 100% 틀리다. 군대는 절망의 나날들이다.”(2003년 4월 3일)
“고참 중에 힘든 고참이 들어와서 내무생활이 더 힘들어졌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 어렵다.”(2003년 5월 25일)
한 군무원이 훈련병이 쓴 모포와 침낭을 세탁하기 위해 거대 세탁기 안으로 넣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공식 대한민국 육군 유튜브 영상 캡처
27도나 휜 팔을 가진 김 일병이 현역 판정을 받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 일병은 현역 입대를 해야 하는 신체검사 3급 판정을 받았다. 병무청 지정병원에서 ‘27도 변형, 근력 약화’가 보인다는 병사용 진단서를 받았지만 팔의 변형이 30도가 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물론 병사용 진단서는 참고사항이므로 징병 전담 의사가 독자적 판단에 따라 신체 등급을 판정할 수 있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이후 징병신체 검사 등 검사규칙은 2015년 10월 개정돼 팔의 변형이 20도만 넘어도 4급 판정을 받아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게 됐다.
현역 판정을 받았지만 육안으로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팔이 불편한 김 일병에게 세탁병 보직을 맡긴 것도 문제였다. 세탁병은 물 먹은 모포나 침낭을 옮기는 일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왼팔로는 역부족이었다. 세탁 특기 직무 명세표에선 요건을 ‘사지가 완전해야 함’이라고 정하고 있다. 김 일병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김 일병의 후임은 “세탁 트레일러를 옮기는 것은 사람이 많이 필요하고 힘도 필요한데 팔이 안 좋으니까 (군무원이 빈정거리는 투로) 귀찮다는 식으로 소외시키곤 했다”고 전했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신체적 약점으로 인해 소외 받는 현실에서 김 일병은 점점 벼랑 끝으로 몰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보직 변경 권한이 있었던 여 중대장은 김 일병의 팔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보직을 변경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김 일병은 대학에서 정보처리학과를 전공했고,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 4개나 있었다. 김 일병은 ‘통신’ 병과를 가길 희망했지만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목을 맨 김 일병을 발견한 뒤, 부대에선 적절한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김 일병이 발견된 뒤 병원에 이송되기까지 47분이 걸렸다. 골든타임을 놓친 셈이다.
목맴 자해사망 시도자를 신속하게 병원으로 이송하면 소생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2010년 발간된 대한응급의학회지에 따르면 2005년 5월부터 2009년 7월 사이 자해사망을 목적으로 목을 맨 뒤 발견돼 응급실로 실려 간 30명 가운데 15명이 소생했다. 2016년 나온 해외 논문(Neurologic outcome of comatose survivors after hanging a retrospective multicenter study)에 따르면 혼수상태로 응급실에 도착한 목맴 시도자 809명 가운데 209명(25.8%)이 목숨을 건졌다.
목맴 시도자 소생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는 신속한 병원 이송이다. 2014년 출간된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에 따르면 목맴 시도자 가운데 소생한 집단의 경우 환자 발생 신고 시점부터 병원 도착까지 걸린 시간이 18.74분(오차 8.52분)이었고, 소생하지 못한 집단의 경우 21.72분(오차 10.15분)이었다.
세탁이 끝난 모포와 침낭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공식 대한민국 육군 유튜브 영상 캡처
김 일병은 목맴 시도를 한 뒤 비교적 신속하게 발견됐다. 김 일병은 위병소 난로 설치작업을 마친 뒤 휴식하다가 오후 2시 45분쯤 막사 옥상으로 향했다. 오후 3시 25분쯤 부대 동기에게 발견됐다. 당시 의무병의 증언에 따르면, 발견 당시 맥박이 남아 있었고, 기침도 했다. 미세하게나마 소리도 냈다. 하지만 당시 당직 사령은 김 일병 발견 보고를 받고 상급 기관에 상황 보고하느라 20분가량 뒤에나 119에 신고했다. 오후 4시 12분에 병원에 도착한 김 일병은 전문 소생술을 받았지만 결국 오후 7시 10분에 숨을 거뒀다.
다음은 김 일병이 신병수첩에 마지막 남긴 메모 가운데 일부다.
“누군들 군대 오고 싶어서 왔나? 나도 오기 싫었다. (중략) X신인 나를 부른 너희 잘못이다. (중략) 그냥 내보내 주지 않으니 죽어서라도 나가고 싶다. 역시 이런 생활은 못 하겠다. (중략) 날 왜 불러야만 했었는가? (중략) 멀쩡한 몸으로 공익 간 사람들은 무엇일까?”
김상엽 일병 사건을 조사한 손민균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은 “김 일병의 경우 결국 국가의 명령에 따라 과도한 공무를 수행하다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해사망이라고 하더라도 사망의 부대적 책임이 큰 경우에는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김 일병이 발견된 뒤 신속한 응급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당직 사령이 절차를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훈련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