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 무서워 자살? 말도 안돼” 순직 요청…베트남전 PTSD 자해 사망 인정 첫 사례 될 수도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일요신문] “성교 불능으로 인해 고민하던 안광철 하사, 유격 훈련에 공포를 느껴 참석하지 않은 뒤 군무이탈로 받을 처벌이 두려워 수류탄을 깔고 자해 사망했다.”
1971년 11월 16일 백령도에서 있었던 안광철 하사 자해 사망을 두고 군 헌병대가 내린 결론의 요지다. ‘월남전’ 파병에서 돌아와 ‘인헌무공훈장’을 받은 군인 자해 사망 사건의 결론이기도 했다. 안 하사는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파병돼 만 11개월 동안 ‘베트콩’으로 불린 북베트남군과 싸웠다.
“말이 안 되죠. 형님이 소속된 청룡부대는 베트남전 파병 부대 가운데 가장 험한 전투를 많이 한 부대예요. 거기서 돌아온 사람이, 하사가 되기 위해서 간부 훈련까지 견딘 사람이 유격 훈련이 무서웠다고요? 조작이라는 걸 당시에 다들 알고 있었어요.”
안 하사 동생 안광덕 씨는 군 조사 결과를 믿지 않았다. 다만 당시엔 군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 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안광덕 씨는 50여 년이 지나서야 여전히 외롭게 백령도에 묻혀 있던 형님의 유골을 고향인 충북 진천으로 옮겼다. 그때 형님의 명예를 되찾아줘야겠다는 생각에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를 찾았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이 휴식시간에 장비를 점검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실제로 안광철 하사가 속했던 청룡부대는 베트남전 파병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부대 가운데 하나다. 승리로 이끈 작전이 많아 혁혁한 공로를 세운 부대로 평가받는다. 확인된 것만 8번의 큰 작전에서 승리의 깃발을 휘날렸다. 특히 고노이섬 작전은 가장 치열했으면서 베트남전 파병 역사에 남을 승리로 전해진다.
고노이(Gò Nổi)섬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로 유명한 다낭에서 남쪽으로 25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던 고노이섬은 요새로 불렸다.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미군은 1968년 5월 4일부터 8월 24일까지 3개월 동안 작전을 펼쳤지만 ‘고노이 요새’를 함락할 수 없었다. 적 917명을 사살했지만 미군도 172명이 죽었다.
미군과 한국군은 합동으로 이듬해인 1969년 5월 26일부터 11월 7일까지 6개월 동안 여단급 병력을 동원해 고노이섬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한국군은 해병 제2여단 1대대, 2대대, 3대대, 5대대, 포병대대 등 거의 전 병력을 투입했다. 청룡부대는 1969년 6월 3일부터 8월 15일까지 고노이섬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적 1418명 사살, 한국군과 미군은 합쳐서 81명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안광철 하사는 1969년 8월 13일 파병을 마치고 돌아왔다. 고향 마을에선 고생한 안 하사를 영웅으로 대접하며 며칠 동안 잔치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안 하사는 예전의 알던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를 따라서 산에 가 장작을 패고 팔아서 가계에 도움을 주던 장남’이 아니었다. 동생 안광덕 씨가 기억하는 형님은 눈빛부터 달랐다.
“눈빛이 호랑이가 돼서 왔더라고요. 형님이 마을에서 소문난 예의 바른 청년이었는데, 월남 다녀와선 전에 안 하던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고요. 당시엔 부모님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큰일 나던 때였는데, 형님이 담배를 피우더라고요. 주변에서 뭐라고 하면 자기도 놀라면서 담배를 끄던 게 기억나요. 자기도 모르게 그때 기억들이 떠올랐던 거죠. 당시 분대장이었는데, 매복한 베트콩에 당해서 분대원들이 다 죽고 혼자 살아나왔다는 얘기를 했어요. 다른 사람이었어요. 신경도 상당히 예민해서 화도 잘 내고요.”
안 하사는 짧은 휴가를 뒤로하고 1969년 10월 백령도 화기중대로 복귀했다. 전쟁의 참상이 안 하사를 괴롭혔지만 이를 치료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란 용어는 1980년에 미국 정신의학회가 처음 쓰기 시작했다. 당시엔 전쟁을 겪은 군인들에 관한 이해가 낮았다.
현재는 전쟁을 치른 군인에 관한 연구가 상당히 진행됐다. 베트남 참전 군인 78%가 PTSD를 앓고, 20%가 자해 사망을 시도했다는 사실(일반인보다 8.5배 높음)도 드러났다. ‘참전 국가 유공자들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위험 인자’라는 논문에선 “잔학한 행위를 경험하는 것은 전체 전투 상황과는 무관하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위험을 증가시킨다”고 기술한다.
베트남전 당시, AP통신 기자인 닉 우트가 촬영한 ‘네이팜탄 소녀’. 사진=연합뉴스
백령도 부대에 전입한 안 하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안 하사와 함께 월남전 파병을 다녀온 뒤 백령도에 전입한 조 아무개 하사에 따르면, 안 하사는 다른 하사들과 대화가 거의 없었다. ‘띨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혼자 술을 마시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가끔 후임 하사를 구타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안 하사 고향 친구가 기억하는 안 하사와는 완전 달랐다. 안 하사 고향 친구는 “매우 성실했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으며 대인관계도 무척 좋았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백령도 부대 생활마저 열악했다. 당시 부대원들에 따르면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궁핍했다.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고 잠자리도 엉망이었다. 한겨울에 난로도 피우지 못할 정도였다. 안 하사의 몸과 마음은 악순환을 겪으며 피폐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안 하사는 실제 자해 사망하기 전날 진행된 산악 유격 훈련을 무단이탈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안 하사는 탈영한 것이 아니라 교육장에서 200m가량 떨어진 옹진옥이라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PTSD 증상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했을 때 안 하사는 행동은 과거 무섭고 두려웠던 경험에 관한 ‘회피’ 증상으로 볼 수 있다고 정신과 전문의들은 전했다.
안 하사가 성교 불능으로 고민했다는 사실은 확인하기 어렵다. 성교 불능 관련 당시 군 헌병대 조사 결과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백령도 부대원이었던 성 아무개 상병의 진술이었다. 하지만 위원회 조사 결과 성 아무개 상병은 주민조회상 ‘자료 없음’으로 확인됐다. 기록에 따르면 성 아무개 상병은 같은 부대원 조 아무개 씨에게 이를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조 아무개 씨는 위원회에 “안광철 하사가 성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고 답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과거 군 수사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고, 안광철 하사가 군 복무를 기점으로 급격한 성격 변화를 보인 점 등을 미뤄 안 하사가 PTSD로 고통 받다가 자해 사망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위원회는 국방부에 안 하사의 자해 사망과 PTSD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해 순직으로 결정해달라고 요청해둔 상태다.
순직자 분류기준표에 따르면 ‘직무수행 또는 교육훈련 등 공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 사유로 발생하거나 악화한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이 그 정신질환으로 인하여 자해행위를 하여 사망한’ 경우 3형 순직에 해당한다. 국방부의 순직 결정이 이뤄진다면, 베트남전 파병 군인의 정신질환을 인정한 첫 예우가 된다. 그동안은 고엽제 피해를 봐 육체적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파병 군인을 위주로 보상이 이뤄져 왔다.
한편 안광철 하사는 1969년 6월 6일 인헌무공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국가유공자 대상자다. 인헌무공훈장은 무공훈장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5등급에 해당한다. 안 하사의 형제자매나 직계존속이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는다면 보훈처가 직권으로 국가유공자 신청할 수 있다. PTSD를 떠나 행정 절차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안광철 하사는 이미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어야 했다. 동생 안광덕 씨는 형님이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이번 위원회 진정 전엔 모르고 있었다.
안광철 하사 사건 조사를 담당한 김영규 조사관은 “당시엔 베트남전 파병 군인에 관한 이해가 낮았던 게 사실이다. 안 하사 경우 충분한 휴식 없이 복귀하자마자 백령도로 전입됐다”며 “지금까진 고엽제 피해를 겪으신 파병 군인을 중심으로 보상이 이뤄져 왔다. 이번 진상규명을 계기로 넓은 차원에서 예우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어 김 조사관은 “사실 안 하사는 인헌무공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국가유공자 등록과 국립묘지 안장 등 예우를 받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가족에게 통보조차 되지 않았다”며 “같은 경우가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 행정에 조금 더 신경 쓸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