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차례 대출받아 부동산 투자…“결재권자는 뭐했기에” 은행책임론 대두
서울 중구 을지로 79에 위치한 IBK기업은행 본사 전경. 사진=박정훈 기자
#기업은행 A 차장의 ‘셀프 대출’
지난 9월 1일 윤두현 미래통합당 의원실이 기업은행에서 받은 ‘대출 취급의 적정성 조사관련’ 자료에 따르면 기업은행 A 차장은 경기 화성의 한 지점에서 근무하던 당시, 2016년 3월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가족이 운영하는 법인 등에 29차례 대출을 해줬다. 대출 규모는 무려 75억 7000만 원. A 차장의 가족이 대표이사인 5개 법인에 26차례 73억 3000만 원, 개인에게 3차례 2억 4000만 원이다.
대출금은 부동산에 투자됐다. 구체적으로 아파트는 경기 화성의 14건을 포함해 총 18건, 오피스텔은 경기 화성 8건을 포함해 총 9건, 연립주택은 경기 부천 2건 등이다. 최근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A 차장이 투자한 부동산의 평가차익도 수십억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실제로 매매를 통해 차익을 현실화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기업은행은 A 차장의 비위를 한 달 이상 검사했다. 그 결과 이해상충 행위 금지 위반에 따른 금융질서 문란 등을 이유로 자체 최고 징계인 면직을 결정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향후 부당대출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 내부자 거래 관련 시스템을 정비해 재발 방지에 힘쓰겠다”며 “추후 법률 검토를 거쳐 A 차장을 형사 고발하고 실행된 대출금을 회수하는 등의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A 차장의 대출금을 회수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대출 과정 자체만 놓고 보면 불법 요인이 없는 데다가 직원 가족과 관련된 대출을 막지 못한 책임 소재가 기업은행에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금융권 관계자는 “A 차장이 불법을 저지른 게 아니고 내부규정을 어겨 면직 처리됐다”며 “대출도 불법으로 진행된 건 아니라서 대출금 회수는 힘들다”고 말했다.
대출을 통해 얻은 수익 역시 마찬가지다. 구현주 법무법인 한누리 변호사는 “업무상배임죄의 성립 여부는 사실관계만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판례에선 부실대출에 의한 업무상배임죄가 성립한다면 손해액·이익액의 범위를 대출금 전액으로 보고 있다”며 “업무상배임죄가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대출금을 투자해 얻은 수익을 곧바로 손해액이나 이익액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윤종원 기업은행장. 사진=일요신문DB
#A 차장만의 일탈일까?
A 차장의 면직 결정이 ‘꼬리자르기’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석연치 않은 대출 과정 때문이다. 대출은 실무자에서 팀장, 지점장, 센터를 거쳐서 실행된다. 또 은행원은 입사할 때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하고 직계존비속 관련 대출을 담당할 수 없다. 4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적발되지 않고 29차례나 가족 법인에 대출을 실행하기 쉽지 않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사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A 차장처럼 대출을 실행할 수 있지만, 보통 결재권자 선에서 막힌다”며 “해당 지점의 팀장과 지점장이 왜 결재해줬는지 이해가 안 되고 이런 일을 처음 접한다”고 말했다. 시중은행 다른 관계자는 “팀장과 지점장이 진짜 가족인지 몰랐다고 하면 가능할 수는 있다”며 “알고도 그랬다면 고과를 위해 승인해준 것처럼 보이는데, 신용대출도 부실나면 지점장이 문책당하는데 굳이 리스크를 안고서 해줬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출 취급을 A 차장이 아니라 옆에 직원이 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여당에서도 기업은행에 대한 책임 추궁과 불법 대출 전수조사를 촉구했다. 지난 9월 2일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가 부동산 대책에 사활을 걸고 나서는 동안 기업은행 직원이 76억 원을 셀프대출 받아 부동산 투기를 한 사실이 적발됐다”며 “서민에게는 DTI(총부채상환비율), LTV(주택담보대출비율) 등을 들먹이며 까다롭게 굴면서 자기들은 셀프 심사를 통한 ‘프리 패스’로 부동산 투기를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A 차장뿐만 아니라 윤종원 기업은행장을 포함한 책임자와 관련자들을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기업은행 관계자는 “이번에 문제가 된 대출은 A 차장의 아내 가족들에게 진행된 건”이라며 “은행에서 직원 아내 가족까지 모니터링을 하면서 제한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어 “상급 결재권자인 지점장은 관리 소홀 사유로 인사 조치됐으나 징계 수위까진 말해주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편 과거에도 은행권의 ‘셀프 대출’이 문제로 지적된 바 있다. 2015년 KB국민은행의 한 지점 직원 3명이 지점장의 배우자가 대표로 있는 회사 2곳에 19억 원을 부당 대출해줬다가 내부 감사에서 적발됐다. 당시 KB국민은행은 담당 직원들에 대한 민·형사상 조치를 진행했고 지점장은 면직됐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