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13세 역대 최연소 세계대회 ‘오청원배’ 도전…“기풍이요? 인공지능처럼 두려고 노력”
결승전을 마치자 바로 손을 잡고 체육관 뒤편 정원으로 데려가 열심히 독사진을 찍었다. “학교 공부는 오전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 바둑에 전념한다”는 꼬마는 “프로기사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약 2년 후, 2012년 7월에 프로가 되었다. 입단 기록은 만 12세 4개월. 이세돌 9단보다 딱 하루 빠른 역대 최연소 입단 5위 기록이다. 충암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신진서가 프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서 열린 세계대회 출장을 나갔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중국바둑기자 몇 명과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누군가 어린 중국기사 몇 명을 극찬했다. 쭉 듣고 있다가 약이 올라서 “한국엔 이번에 입단한 신진서와 신민준이 대단한 영재다. 어떻게 성장하는지 잘 지켜봐라”라고 항변했다. 그들 앞에선 호언장담했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대기사가 될 줄은 몰랐다.
당시 만 13세 신진서는 입단 1년 차였다. 프로기사 280명 중 최연소였다. 나이 어린 것 빼곤 딱히 내세울 성적이 없었던 때다. 영재입단대회 자체가 커다란 실험이었다. ‘실력이 약간 부족하더라도 아주 어릴 때 프로세계로 들여 키워야 대성한다’는 주장이 득세했던 시절이다. 제1회 대회는 거의 신진서, 신민준 두 명을 위한 맞춤 등용문이었다. 물론 이 둘은 실력마저 부족함은 없었다.
2020년 9월 2007년생 김은지 초단이 오청원배 국내선발전 결승에 올랐다. 오른쪽은 2010년 전국체전 어린이부 우승자 신진서.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2019년 초, 일본기원은 ‘영재특별채용추천기사’란 제도를 만들었다. 열 살 나카무라 스미레 초단이 주인공이었다. 스타가 되었다. 언론에선 일본 바둑계를 일으킬 인재로 띄웠다. 그러나 객관적인 실력은 한국 ‘아마추어’ 김은지보다 약했다. 그래서 스미레가 화제가 될 때마다 “한국도 특별입단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김은지는 2015년, SBS 교양 프로그램 ‘영재발굴단’에서 일찍이 바둑천재로 주목받았다. 입단대회는 열 번 넘게 실패했다. 아픔을 참고 아마대회를 전전하며 우승몰이를 하던 때였다. 프로기사도 심심찮게 이겼다. 실력은 입증되었지만, 한국 정서상 특별입단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드디어 2020년 1월에 ‘자력’으로 프로기사가 되었다. 만 12세 8개월 나이였다. 김은지는 입단 인터뷰에서 “입단대회에서 떨어질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10초 바둑을 두면서 괴로움을 잊었다”라고 말했다.
세계여자바둑대회 오청원배가 있다. 2018년부터 열렸고, 초대 우승자가 김채영이다. 2019년 벌어진 제2회 대회에선 최정이 끝까지 남아 한국기사가 우승독식하고 있는 대회다. 우승상금이 50만 위안(약 8600만 원), 준우승 상금은 20만 위안(약 3500만 원)이다.
올해 한국대표는 다섯 명. 전기 우승자 최정, 랭킹 시드 오유진과 김채영, 상비군 시드를 받은 오정아가 출전 대기 중이다. 남은 본선행 티켓 한 장을 두고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 동안 여섯 명이 토너먼트를 벌였다. 여기서 김은지가 박지은, 김혜민, 박지연을 연거푸 꺾고 그 한 장을 움켜쥐었다. 결승을 마친 후 김은지는 “대표 선발은 상상하지 못했다. 부족한 게 많다. 앞으로가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긴 상대가 모두 여자국수, 명인 등으로 한 시절을 평정했던 타이틀 홀더들이다.
김은지는 아직도 378명 프로기사 중 최연소다. 이번에 태어난 날짜로부터 13년 4개월 만에 세계대회에 출전한다. 역대 최연소 기록이다. 입단 8개월 차 새내기라 선발전 참가 자체가 처음이었다. 최근 김은지는 한 인터뷰에서 “3년 안에 최정을 넘어서겠다”라고 말했다.
한국기원 청소년국가대표팀 코치 조인선은 “꿈을 높게 잡는 건 좋다. 하지만 최정 9단도 계속 성장 중이다. 한동안 여자바둑계는 최정 시대가 유지될 거다. 3년보다는 많이 걸리겠지만, 김은지 초단은 이미 차세대 1인자를 예약한 상황이다. 곧 여자 최정상 그룹에서 활약할 거다. 지금 실력만 봐도 13세 때 최정보다는 세다. 또래 남자기사까지 잘 제압하는 점도 특별하다. 아주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중1 나이인데도 딴 곳에 눈 돌리지 않고, 바둑공부만 전념한다. 굉장히 성실해서 감독님과 코치진 모두 기대가 크다”라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최정과 공식대국에선 두 번 만났다. 8월 말 열린 여자바둑리그 통합라운드와 9월 초에 벌어진 여류국수전 16강이었다. 아직 승수는 없다.
김은지 초단이 오청원배 국내선발전 결승에서 박지연 5단을 넘고 역대 최연소로 본선티켓을 거머쥐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눈을 해외로 돌리면 중국에 또래 라이벌 우이밍 2단이 있다. 2019년 입단하자마자 중국 여자갑조리그에서 대활약을 펼쳤다. 우이밍을 직접 본 프로들은 ‘엄청나게 세다. 지금 김은지와 비교해도 누가 강한지 알 수가 없다’는 평을 한다. 일본에선 스미레가 칼을 갈고 있다. 두 살 어린 나이가 무섭다.
조인선 코치는 “김은지, 우이밍, 스미레가 모두 정상권에서 활약하는 날을 기다린다. 이들이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놓고 경쟁하는 구도가 되면 바둑계가 정말 재미있어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이번 오청원배에 중국기사는 총 아홉 명이 나선다. 이 중에 미래의 라이벌 우이밍이 있다. 네 명이 출전하는 일본기사 명단에 아쉽게도 스미레는 없다.
김은지는 여자랭킹 8위(9월 기준)다. 올해 여자리그에선 2지명으로 뽑혀 정규시즌에서 6승 8패를 기록했다. 이번 선발전까지 포함한 공식대국 전적은 27승 23패. 그녀에게 기풍을 묻자 “잘 모르겠어요”라면서 웃는다. 공부하면서 닮고 싶은 바둑이 있는지 다시 물었다. 이창호, 박정환의 이름을 말해도 알듯 말듯 미소만 짓는다.
마지막에 조용히 “전 인공지능(AI)처럼 두려고 노력해요”라고 말한다. 완벽한 바둑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다. 이번 오청원배 선발전에서 기적을 만든 소녀, ‘은공지능’은 지금 이 시각에도 끊임없이 ‘딥러닝’ 중이다.
[승부처 돋보기] 이길 수 없는 바둑을 이겼다 제3회 오청원배 한국대표선발전 결승 ●김은지 초단 ○박지연 5단 293수 흑불계승 장면도1 #장면도1 ‘실수’ 중반까지 형세는 흑이 좋았다. 포석도 앞섰고, 우상귀와 하변 접전에서 모두 득점을 올렸다. 김은지도 유리하다고 보고 좌변 실리를 더 챙기지 않고, 중앙(흑 세모 표시)을 더 두텁게 했다. 백1이 아주 날카로운 반격이었다. 이후 흑의 행마가 살짝 꼬였다. 국 후 김은지는 “흑10(실전 107번째 수)이 실수였습니다. 그냥 A자리에 두었으면 쉬웠어요. 백11로 밀고 들어오는 수를 못 봤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무렵 AI 승률 곡선은 70% 흑 유리에서 70% 백 유리로 바뀌었다. 장면도2 #장면도2 ‘반전’ 중앙 행마에서 실수가 나온 후 약 40여 수를 설명하는 과정에선 아쉬움이 묻어난 참고도만 그려준다. “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해볼 데는 다 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흑1로 둔 수는 과감한 베팅이었다. 만약 실전에서 상대가 백2 대신 흑3자리로 두어 흑 석 점(네모 표시)을 잡았다면 거의 돌을 던져야 했다. 마음을 비우고 덤벼드니 박지연도 움츠러들었다. 너무 유리했던 박지연은 변수를 줄이려고 상변에 가일수를 했는데 이게 오히려 변수를 만들었다. “중앙에서 백돌 네 점까지 잡아선 차이가 확 좁혀졌어요.” 김은지는 상변 사활을 빌미로 늘어진 패 모양까지 만들었다. 패를 이길 생각이 없었다. “죽었지만, 다 놓고 따내게 하면 약간 득이라고 봐서”라고 말한다. 장면도3 #장면도3 ‘역전’ 흑1이 집으로 엄청나게 큰 자리다. 한편 김은지의 승부호흡을 보여준 수다. 이 장면 끝내기에서 포인트는 하변 흑 한 점(X표시)의 향방이었다. C로 잇는 게 정수지만, 그러면 미세하게 진다고 봤다. 흑1로 두고 버틴 이유다. 여기서 박지연이 백2로 따낸 수가 패착이다. 상변을 정리하면 변수 없이 이겼다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가일수 안 해도 패(B자리)는 너무 늘어져서 승부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흑5로 찌른 수가 결정적이었다. 나중에 흑D, 백E 교환이 선수가 되어 흑이 선수로 C로 이을 수 있었다. 돌이 끊어지면서 백은 F로 두어 살아야 되기 때문이다. 20여 수만에 AI 승률이 99% 흑 승리로 치솟았다. 정말 이길 수 없는 바둑을 이겼다. 기적을 만드는 소녀, 김은지다. |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