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재 없다던 아버지 김성래 4단의 평가 뒤집어…“새가슴 극복 ‘마음 조절법’ 어릴 때부터 훈련”
김채영 6단은 삼성화재배 국내선발전에선 최정 도은교 김은지 김혜민 오유진을 차례로 꺾고 여자조에 배정된 본선행 티켓 한 장을 움켜쥐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우승 후엔 좀 느긋해졌어요. 마음이 푸근했죠. 그런데 작년부터 성적이 좀 나빠지니 다시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졌어요”라고 말한다. 성적이 나빠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여자기성전에서 준우승했고, 한국여자바둑리그는 2019년도 10승 4패, 2020년엔 11승 4패로 다승 4위에 올랐다. 특히 올해 9월 벌어진 삼성화재배 국내선발전에선 최정(1위), 도은교, 김은지, 김혜민, 오유진(2위)을 차례로 꺾고 여자조에 배정된 본선행 티켓 한 장을 움켜쥐었다. 삼성화재배 본선 32강은 10월 말에 펼쳐진다.
만 24세, 아직도 꽃다운 청춘이다. “지금은 바둑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할 수 없어요. 2년 전만 해도 대학진학이나 방송 쪽 일을 살짝 고민했었죠. 이젠 돌이킬 수가 없어요. 보통 여자기사들은 나이가 차면 결혼, 출산 등으로 승부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됩니다. 그전까진 오직 바둑에만 전념할 거예요. 적어도 30대 초까진 생활에서 성적을 가장 우선하는 기사로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바둑가족이다. 아버지가 프로기사(김성래 4단)고, 어머니는 바둑교실 선생님이다. 동생 김다영도 프로 3단이다. 아버지와 두 딸이 모두 프로기사인 ‘3부녀 프로기사’로 언론에 자주 소개되었다. 동생이 입단할 무렵 아버지 김성래는 “동생 다영이는 재주와 승부욕이 있어 빠르게 성장할 거로 봤다. 채영이는 바둑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기재가 보이지 않았다. 둘 다 내 영향으로 바둑을 시작했기에 바둑을 배운 지 6년쯤 됐을 땐 본인들 의사를 들었다. 계속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할지 어떨지. 관두고 싶다고 말하면 학업으로 전향할 생각이었다. 채영이는 계속하겠다고 말했다”라고 인터뷰했다.
김채영은 “당시 아버지 말씀 때문에 제가 재능 없는 기사라는 이미지가 있어요”라면서 웃었다. “천재과는 아니지만 기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최정과 오유진은 어린 시절부터 대회에서 주목받았죠. 물론 전 그런 건 없었어요. 바둑 재능을 한 가지로 한정 짓긴 어려워요. 기술적인 면도 여러 갈래가 있고, 바둑 외적으로 승부 호흡이나 마인드컨트롤은 또 다른 능력입니다. 그 어느 것이든 노력으로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채영 6단(오른쪽)은 2년 전 오청원배 결승에서 최정 9단을 2-0으로 꺾고 우승했다 .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기재가 없었다’고 평가받은 입장에서 요즘 바둑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는 어린 영재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김채영은 유일하게 한중일 삼국 영재 김은지, 스미레, 우이밍과 대국해 본 기사다. “어린 친구들과 두면 색다른 자극을 받아요. 또래에 같이 승부하는 동료들과는 다른 느낌이죠. 나이 어린 기사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수준이 올라가는 게 눈에 보여요. 예전 같으면 대국 경험을 통해 쌓아야 할 초반 부분을 AI로 대체하니 격차를 아주 빨리 좁힐 수 있어요. 한중일 여자 영재들은 모두 공부량이 뒷받침되어서 초반을 아주 잘 둬요. 중후반 힘도 셉니다. 최근 스미레와 대국에선 좀 무리했다 하마터면 질 뻔했죠. 김은지는 실력이 늘어가는 속도가 놀라워요.”
“중국 우이밍은 이미 강해요. 작년 여자갑조리그에서 대국했는데 제가 완패를 당했어요. 성격도 활달한 편이죠. 전 어릴 때 스스로 약하다고 느껴서 도장에서 오빠들이 복기하면 질문 한번 하기 어려웠어요. 지난 항저우기원 교류전에서 우이밍을 보니 정말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며 언니와 오빠들 옆에 틈을 비집고 들어가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며 참견하더군요. 아주 어린 나이에 입단해서 가능한 일 같기도 하고, 성격적인 면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공부환경이 아주 좋다고 느꼈어요. 지금은 모두 성장하고 있을 때라 ‘누가 세다, 약하다’를 따지는 의미가 없어요. 얼마나 꾸준히 노력하는지, 언젠가 다가올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문제죠. 저도 되돌아보면 어릴 때 많은 벽이 있었어요. 하나하나 극복해가는 건 자신만의 몫이죠. 지금 영재기사들은 나이가 어리다는 게 최대 장점이에요.”
김채영의 눈은 맑고 깊다. 인터뷰 중에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중요한 대국이 잡히면 일정이 며칠 남아있어도 갑자기 심장 박동수가 올라가고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아요. 특히 대국 전에 가장 많이 떨어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죠. 어릴 때는 워낙 심해서 마음 조절하는 법을 가장 많이 단련했어요.”
삼성화재배 국내선발전 결승에서 맞붙은 오유진(왼쪽)과 김채영.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대국을 마친 후 눈은 항상 충혈되어 있다. 어떤 승부라도 곧은 자세로 앉아 최선을 다한다. ‘최근 대국에선 많이 긴장한 표정이 드러난다’고 전하자 그건 아니라고 말한다. “대국장에선 얼굴이 바뀌는 거죠. 바둑판을 앞에 둔 김채영은 다른 사람이에요. 조금 전 편하게 이야기하던 친구 또는 어린 후배라도 상대에 대한 의식은 안 해요. 누가 나를 보는지조차 신경 안 쓰고, 오직 바둑판에만 집중합니다.”
“전 바둑기사로 잘된 케이스라고 봐요. 그래도 경험하지 못한 학창시절이나 가보지 못한 여러 길에 대한 미련은 있어요. 프로기사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지만, 졌을 때 아픔은 언제나 힘듭니다. 질 만한 상대에게 져도 아픔은 똑같아요. 이 스트레스는 다시 대국으로 해소해야 합니다. 이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날이 오면 승부에서 떠날 때가 온 거죠.”
이상형을 묻자 “생각이 깊고, 말이 잘 통하는 남자”라고 답한다. 가정법으로 물었다. 만약 남자친구가 있다면 받고 싶은 선물은 뭔가. “가벼운 액세서리 정도면 만족해요. 예를 들어 고가의 핸드백을 받으면 바로 환불하라고 말할 것 같아요. 욕심이 없는 건 아니고 쓸데없는 지출을 싫어하는 편입니다.”
바둑 하나에 10대와 20대 전부를 건 여자다. 열정을 가지고 한 가지에 몰입하는 진지함이 그녀만의 매력이다. 최근 읽은 책이 ‘AI 시대 인간과 일’이란다. AI 시대 김채영의 일은 여전히 ‘바둑 두기’다.
[승부처 돋보기] 최정·오유진 격파! 2020 삼성화재배 국내선발전 여자조 우승의 여정 장면1 #장면1 ●최정 ○김채영 국내선발전 1라운드 동갑내기 최정과 역대 전적은 4승 15패로 많이 밀려있다. 그래도 바둑팬에겐 ‘김채영이 최정은 잘 이긴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만큼 알짜배기 4승이기 때문이다. 2년 전 거둔 2연승으로 오청원배에서 우승했다. 가장 최근에 거둔 2승도 의미가 크다. 지난 여자리그에선 무패 질주하던 최정의 연승을 막은 빛나는 1승이었다. 이번 삼성화재배 여자조 선발전 승리는 내용에서도 완승이어서 값지다. 장면도는 중반의 기로. 김채영은 “중앙 대마(세모 표시)는 크게 위험하지 않다고 봐서 우상귀 백1로 실리를 더 챙겼다. 백5로 나가선 거의 타개가 되었다. AI로 복기해봐도 이게 정수였다”라고 설명했다. 장면2 #장면2 ●김은지 ○김채영 국내선발전 3라운드 이번 대회 예선은 각자 40분으로 생각시간을 줄였다. 그래도 이 대국이 끝날 때까지 3시간 48분이 걸렸다. 국후 김채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힘겨워했다. “바둑도 불리했고, 나중엔 만년패가 나온 복잡한 내용이었다. 그보다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힘들었다”라고 회상했다. 김채영은 “장면2 흑1이 실수였다. A로 두었어야 한다. 같은 만년패라도 모양이 다르다. 실전은 A로 넣어 패를 하다가 B로 이으면 빅으로 해소할 수 있는 권리가 백에게 생겼다”라고 설명했다. 김채영은 나중엔 패를 하는 과정에서 우상귀와 바꿔치기가 나와서 역전승을 거뒀다. 장면3 #장면3 ●오유진 ○김채영 국내선발전 5라운드(결승) 랭킹 2위 오유진과 최후의 결전. 김채영은 “국내리그에선 내가 훨씬 많이 지는 쪽이지만, 공식 전적은 오히려 8승 5패로 앞선다. 나도 신기하다”라고 표현했다. 중요한 승부에선 남다른 독기가 나오는 김채영. 이 대국도 역전승이다. “좌변 접전에서 둘 다 초읽기에 몰렸다. 흑이 확실하게 이길 찬스를 놓쳤다. 백1로 약간 비틀었는데 흑2으로 받은 게 패착이다. 백3이면 좌변 과 상벽 백과 연결하는 수가 맞보기다. 이렇게 되어선 이겼다. 흑2로는 C로 지켰으면 별일 없었다. 약간 손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형세는 만만치 않다”고 설명해주었다. |
박주성 객원기자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