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팀 콘텐츠 236건 제작, 법률팀 ‘고발장’ 지원…“경찰 집회인원 추산 공표 막아” 자평도
퇴진행동이 작성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산서. 사진=최훈민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는 2016년 10월 29일 처음 열렸다. 국정농단 사태가 수면 위로 드러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2016년 10월 19일 JTBC는 최순실 씨 최측근이었던 고영태 씨를 인터뷰한 뒤 최 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 연설문을 사전에 열람하고 수정도 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청와대는 부인했지만 5일 뒤인 10월 24일 JTBC는 최 씨가 사용하던 사무실에서 태블릿 PC를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이 태블릿 PC 안에선 박 전 대통령이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시절부터 대선 후보 때와 대통령 때 연설문까지 총 44개의 연설문이 들어있었다. 보도 후 여러 의혹에 대해 부인하던 박 전 대통령이 10월 25일 공식 사과를 했고,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문건에 따르면 퇴진행동은 2016년 11월 15일 집회기획팀을 구성하고 1차 회의를 열었다. 공동팀장 인선과 팀 체계를 갖추고 11월 19일 4차 범국민행동의날 준비에 착수했다. 노동자연대 출신 김광일 씨와 윤희숙 전 한국청년연대 대표가 각 시민단체 활동가 21명으로 구성된 집회기획팀의 공동팀장이 됐다고 나타났다.
금융정의연대, 노동자연대, 민권연대, 민주노총, 민주행동, 박근혜정권퇴진서울행동, 사회변혁노동자당, 사회진보연대, 예수살기,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한국진보연대, 한국청년연대, 4·16연대 등 시민단체 14곳에서 활동가를 퇴진행동 집회기획팀으로 파견했다.
문건에 따르면 퇴진행동은 경찰의 집회 참여 인원 추산과 퇴진행동 측 추산이 큰 격차를 보이자 언론팀에게 이를 대응토록 했던 정황도 적혀 있었다. 언론팀 등은 경찰의 집회 참여 인원 추산이 왜곡됐다며 항의하는 공문을 발송하고 항의 기자회견, 분석자료 등을 배포하는 걸로 대응했다. 그 후 경찰은 집회 참여 인원 추산 발표를 중단했다. 이를 두고 퇴진행동은 문건에 “경찰 측에서 집회 인원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게 되는 성과를 이룸”이라고 자평했다.
언론팀은 남정수 민주노총 대변인과 다산인권센터 출신 박진 씨, 참여연대 출신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이 공동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그 아래 총 11명이 활동했다. 참여연대가 3명으로 가장 많은 인원을 파견 보냈고 빈곤사회연대와 노동자연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회변혁노동자당, 한국진보연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이 소속 활동가를 퇴진행동에 파견 보냈다. 언론팀은 성명 59건, 논평 54건 일일브리핑 21건, 보도자료 139회 등 총 236건의 콘텐츠를 제작했다.
언론팀은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을 섭외해 총 5회에 걸쳐 ‘왜 촛불인가’라는 기획보도를 했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와도 ‘박근혜 퇴진과 함께 사라져야 할 것들’이란 기획을 하며 김남근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당시 부회장 등의 이야기를 담았다. 언론노조 매체인 미디어오늘도 민변 소속 이재화 변호사와 권영국 변호사의 이야기를 퇴진행동과 공동 기획했다.
민변 소속 변호사가 퇴진행동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법률팀 덕으로 보인다. 법률팀장은 민변 출신 권영국 변호사였다. 김상은 변호사, 김도희 변호사, 이재화 변호사와 이호중 서강대 교수 등이 법률팀에 소속됐다. 이들은 총 18차례 회의를 개최했는데 대부분 민변 사무실에서 열렸다고 나타났다.
퇴진행동 법률팀은 2016년 12월 26일 대통령 권한대행 황교안 전 총리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고발했다. 또 군인권센터가 친박단체를 내란선동 혐의로 고발하는데 고발장을 대리 작성했다고 나타났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 구속영장을 발부하라는 탄원서와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직무유기 혐의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고발한 고발장 등도 법률팀 작품이었다. 전경련이 지원한 극우단체 관제데모 고발장 역시 법률팀 손을 거쳤다.
퇴진행동 문건에 따르면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4월 29일 총 23차례 집회가 열렸다고 나타났다. 퇴진행동은 탄핵 심판 전인 19차까지 1588만 2000명이, 최종 총 1684만 8000명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계산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